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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은황진영행장(滄隱黃震英行狀)
창은(滄隱) 황진영(黃震英) 행장(行狀)
공(公)의 휘(諱)는 진영(震英)이요 자(字)는 망교(望敎)요 호(號)는 창은(滄隱)이며 성(姓)은 평해황씨(平海黃氏)니 고려(高麗) 충절공(忠節公)
휘(諱) 서(瑞)의 후손(後孫)이라.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휘(諱) 옥숭(玉崇)이라는 어른이 계셔 한성판윤(漢城判官)이며 휘(諱)
보곤(輔坤)을 낳으시니 생원(生員)인 휘(諱) 우(瑀)를 낳으시니 목사(牧使)의 목사(牧使)는 휘(諱) 응청(應淸)을 낳으시니 세
상이 대해(大海) 선생(先生)이라 일컬으며 진사(進士)를 하셨고 효자(孝子)로 나라에서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表彰)했으며 또 유일(遺逸)로 천거(薦擧)되여 진보현감(眞寶縣監)에 제수(除授)되고 졸(卒) 후(後)에는 명계서원(明溪書院)에 향사(享祀)하시니 이 어른이 곧 공(公)의 11대조(十一代祖)이시다. 휘(諱) 명계(明溪)는 나라에서 공조참의(工曹參議)로 증작(贈爵)을
받았고 그 후(後) 4대(四代)를 지나서 휘(諱) 한창(漢昌) 호(號) 청부(聽夫)는 학행(學行)이 높아 방리(邦里)에서 큰 존경(尊敬)을
받았으며 그의 유명(有名)한 유고(遺稿)가 있다.
고조(高祖)의 휘(諱)는 재화(載華)요 증조(曾祖)의 휘(諱)는 배곤(配坤)이요 조(祖)의 휘(諱)는 용구(龍九)요 고(考)의 휘(諱)는 도(濤)이니
양세(兩世)모두 은덕(恩德)이 있었다. 비(妣)는 경주이씨(慶州李氏)니 관섭(觀燮)의 여(女)로 부덕호절(婦德壺範)이었었다.
철종(哲宗) 기유(己酉) 6월(六月) 18일(十八日) 공(公)이 정명리(正明里) 제(第)에서 나시니 그 골상(骨相)에 기의(岐疑)하고 울음소리가
우렁차서 대인공(大人公)이 심(甚)히 기이(奇異)하게 여기더니 점점(漸漸) 자라나서 처음으로 수학(受學)하게
되니 그 재사(才思)가 민활(敏闊)하여 번거롭게 가르치지 않아도 곧 또렸하게 해득(解得)하는 것이
빠르더라. 하루는 여러 아해(兒孩)들과 물가에 나가 놀다가 큰 뱀이 길 가운데 버젖이
있거늘 공(公)이 꾸짖어 말하되 이 어떠한 요물(妖物)이 감히 장부(丈夫)의 앞에서 길을 막느냐?
내가 곧 때려 죽일 것이로되 너 또한 살기를 좋아하는 생물(生物)임에 차마 못하겠노라
하고 드디어 그 뱀을 쫓아 보내고 길을 걸어오는 것을 한 마을에 사는 어떤 노인(老人)이
이같은 광경(光景)을 보고 공(公)의 대인공(大人公)에게 아뢰니 공(公)이 말하기를 이 아이의 지기(志氣)가
범상(凡常)치 않으며 또한 생물(生物)에 대(對)하여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장래(將來) 많은
발전(發展)이 있을 것으로 믿으나 그 지기(志氣)가 너무 지나친 것을 근심치 않을 수 없어
적당(適當)한 편책(鞭策)으로서 교양(敎養)코져하나 부자지간(父子之間)의 은의(恩義)가 혹(或) 상(傷)할 것을 염려(念慮)하여 역자이교지(易子而敎之)1)라는 옛 사람들의 말을 받아 사천(沙川) 남공(南公) 구한(九翰) 선생(先生)의 문하(門下)에 입학(入學)시켜 수학(修學)케
하였다. 남공(南公) 또한 가르치는 법(法)이 심(甚)히 엄(嚴)하여 매일(每日) 일정(一定)하게 연석(硏席)에서 훈회(訓晦)하니
그 기거동작(起居動作)과 언행심사(言行心思)가 예의(禮儀)에 맞지 않는 것이 없게 되고 또 인품(人品)이 고상(高尙)해지며
태도(態度)마저 의연해지니 보는 사람들이 그 원숙(圓塾)함에 놀라지 않는 이가 없더라. 또
그 비범(非凡)한 재조로 열심(熱心)히 공부(工夫)하게되니 15~6세(十五六歲)에 경전(經傳)을 통달(通達)하고 특(特)히 저술(著述)에
능란(能爛)하여 서당(書堂)에서 과거예습(科擧豫習)으로 시험(試驗)을 보게되면 노소(老少)를 막론(莫論)하고 많은 학도(學徒) 중(中)에
항상(恒常) 최우등(最優等)에 뽑히는 고(故)로 남공(南公)이 더욱 사랑하여 일시(一時)도 방과(放過)치 못하게 하니
점점(漸漸) 학문(學問)이 높아가며 또 깨닫는 바 인생(人生)의 도(道)를 하나하나 실천(實踐)에 옮기는데 힘쓰니
원근(遠近) 많은 선비들의 중망(重望)이 되였다. 공(公)이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 선조(先祖)께서 우리
후손(後孫)들에게 남긴 유산(遺産)은 근학신행(勤學愼行)이라는 문구(文句)를 문집(文集)에 실어 있거늘 가훈(家訓)으로
전(傳)하고 대대(代代)로 지켜오는 것인데 지금인들 어찌 이 무념(無念)의 교훈(敎訓)을 저버릴 수
있겠는가 하였으며 그 때의 한 고을 사우(士友)로서는 명파(溟波) 이공(李公) 수권(壽權)과 봉남(峰南) 안공(安公) 택선(宅善)과
수하(壽下) 장공(張公) 병(柄) 같은 분들도 모두 두려운 벗들이라. 춘추(春秋)로 경전(經典)을 서원(書院) 또는 향교(鄕校)에서
강의(講義)할 때나 서원(書院)과 향교(鄕校) 직임(職任)을 체임(遞任)할 때는 반드시 공(公)을 초대(招待)해 모시고 거행(擧行)하였다.
庚辰年에 大人公의 居憂로 初喪과 祭祀에 家禮대로 따랐으며 服을 마치자 연달아
內艱喪을 또 當하니 致哀盡禮를 前喪과 꼭같이 하였다 服을 마친 後에도 初中으로
한달에 두번씩 省墓하고 每日 새벽에 일찍 일어나 冠服을 가추고 祠堂拜謁을
하였다.
丙申年에 倭敵에게 國母殺害事件이 生하니 全國民이 國母를 爲하여 義擧가 일
어남에 公도 鄕兵을 거누리고 이 事件에 應하였드니 일을 成事치 못한채 投獄
되였는지라 公이 獄吏를 불러 종이와 붓을 가져오라 命하여 먼저 아전의 무리들의
간사한 것을 치고 다음에 임금의 살핌이 밝지 못한 것을 말하니 獄吏가 그 事實을
그 고을원과 營將에게 솜하였드니 兩官이 모두 歎息하고 이는 世上에서 求하기
어려운 人物이라하고 도리어 謝禮하며 돌려보내니 이 後로부터 公의 聲名이 날로
더하여 멀고 가까운 文人豪傑들이 다 推重하며 따르더라.
그리고 이 地方에 새로 오는 官長들은 반두시 赴任하면 그 문에 이르러 禮를
들였다. 丁酉年에 響山李先生晩燾氏가 東海岸에 旅行케 되어 먼저 公을 찾어와서
三日間을 留하게 됨에 公과 學問과 世上事를 討論하고 左右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내가 朝廷에서 많은 사람들과 접촉하였으되 人品에 있어서나 學問에 있어서 公과
같은 분은 많이 보지 못하였다. 公이 萬君이 海邊벽지에 살지 않고 서울에 살아서
出世에 뜻을 두었다면 國家에 큰 棟樑이 되였을 것이 틀림없었을 것이라 하였다
累世宗楣로 奉先接賓하는 道와 出入應酬하는 節次를 누가 흠앙하지 않으리요。
先世墓道의 顯刻하는 일에 있어서는 寢食을 잊고 誠心과 哀情으로 努力하였으며
또 始祖의 先壇에 옛날부터 齋宇나 祭出이 없어 恒常遺憾으로 生覺해오든바 宗
人撥과 基達로 더부러 그 規模와 計劃을 協議한 후에 各道各邑을 두루다니면서
비바람을 무릅쓰고 정성을 다하여 資源을 모아 完成하였더니 나이 더할수록 添
應이 더 심하여 끝을 맺지못하고 世上을 버렸으니 眞實로 痛歎할 노릇이였다
萬若 몇해만 壽命을 더 빌었더라도 오늘날 陳設되는 簡略한 奠需에 끝이지 않었을
것이다.
戊戌年에 通文을 發하여 京鄕의 大譜를 淸安에서 닦을때 淸安은 곧 傍先祖襄
武公의 世居宗宅이다. 公이 이일에 都總監仕의 責任을 지고 莫重大事를 敦篤히
하여 有終의 美를 거두었다 그리고 祭田이 넉넉지 못한 것과 宗宅이 허무러진
것을 一切 새롭게 넓히고 修理하였으며 또 논과 밭을 얼마쯤 마련하여 宗家로
하여금 窘塞을 免케 하였다 또 始祖의 壇祀에 奠獻하는 것이 자주 改遞되는 것을
未安히 生覺하고 宗中의 公議로 一定한 節次를 定하여 施行케 하였다.
庚戌年에 나라일이 크게 글러졌음에 公이 宗廟와 社稷이 빈터가 된것을 아프게
여겨 문을 굳게 닫고 자취를 감추고 남의 부름에도 參與하지 않고 날로 高尙한
風月泉石의 詩를 외우며 그 悲憤한 餘生을 보냈다. 戊午年四月十四日에 寢
室에서 考終하시니 享年이 七十이라 訃音이 나가자 士友들이 모두 슬퍼하며 말
하기를 德望이 높은 巨士가 사라졌다 하였다. 처음에 峴山西坐之原에 葬事하
였다가 다시 虎田先兆內左麓員乾之原에 移奉하였다.
公이 莊重한 資禀의 品性을 지니시고 高邁한 志氣를 갖으시어 지난날의 岩落한
氣慨는 큰 出世를 期待했으나 때가 아님을 自覺하고 浮雲같은 世上일에 虛無하게
左往右往하느니 보다 차라리 家學淵源의 아름다움에 沈潜하여 옛 聖賢들이 訓
誥하던 글을 琢磨하고 힘써 부지런히 읽어 修己治人하는 道를 實踐하는 것이
옳은 길이라 깨닫고 나날이 善하고 義로운 일이면서 적다하여 疏忽히 하지 않고
行하는데 努力하니 몸에 嚴하든 氣運이 漸漸 너그럽고 和平한대로 나아가고 嬌
慢하게 자랑하는 뜻은 漸漸溫順하고 柔和한데로 기우러져 一言一行이 남에게
厓異함이 없어서 모든 사람마다 머리가 수그러지고 듣는 사람마다 欽慕하였으니
眞實로 學問의 功이 아니었더면 어찌 어러한 人格의 所有者가 되였으리요.
또 自己의 所見만을 옳다하지 않고 남의 意見을 그르다 하지 않고 오직 좋은
일이며 義로운 것이면 좋고 行했으니 깊은 思誼가 宗族에게 높은 信義가 鄕黨에
들어나 큰 宗事에 있어서나 丙申年 國母義擧事件같은 國事에 있어서도 鄕民들이
믿고 따라 나라에도 榮光되게 하였다 이같이 그의 몸에 쌓인 것이 이미 厚한
故로 文辭로 發하는 것도 또한 깊고 그윽하며 높고 굳세어 속된 선비들이 粗粕하고
재치있는 글과는 다른 文化的價值있는 著述이 적지 않았는데 累次의 兵火로 燒
失되고 다만 詩文 몇 篇만 집에 간수해 있을 뿐이다.
配는 順興安氏니 浩善의 女이며 公보다 十年 먼저 卒하고 墓는 집뒷 山西坐之原에
있다. 四男五女를 두었는데 長男은 皞이요 다음은 昶 嚥嶧이요 女는 順興安
鎔軾蔚珍張秉玉平山申裕煥金寧金順龍旌善全海龍에게 出嫁하였다.
皞는 아들이 없어 從弟嘩의 子載宇로 嗣子를 삼고 女는 務安朴鍾漢에게 出嫁
하였다. 昶이 또한 아들이 없어 族弟晥의 아들 允坤으로 뒤를 이었고 女는 順
興安承源順興安孟源坡平尹鈿에게 出嫁했다. 嚥이 一男一女를 두었으니 男은
載舜이요 女는 順興安鎔浡에게 出嫁하였다. 嶧이 二男을 두었는데 載麟載鳳이다
載宇가 四男三女를 두었으니 長男은 德鎭이요 다음은 碩鎭漢鎭翼鎭이요 女는
新安朱宰壽에게 出嫁하고 남어지는 어려서 記錄하지 아니한다.
燦宗이 이웃 고을에 살고 있어 公의 훌륭한 風彩와 뛰어난 擧動을 잘 듣고도
한번도 承拜치 못함을 恨스럽게 여겼더니 하루는 公의 孫載宇가 公의 遺事를
가지고 나에게 狀德之文을 請하거늘 스스로 不足함을 느켜 敢히 이런일을 堪當치
못하나 일찍이 들으니 人物評이 山岳과 같은 氣像을 가추었고 河海와 같은 度量을
퓨어 그 넓고 깊은 모양이 外形으로는 누구나 가까이 할 수 있도록 느끼게 하고
行實로는 可히 天下가 본받을 만한 模範이 된다 하였다. 또한 家狀에 記錄된바가
所聞과 꼭 같으므로 드디어 그 大慨를 꿰매어 孝懇을 막음하고 또 平日에 仰慕의
情誠이 붙여 이르노라.
歲己亥暮春上浣大興白燦宗謹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