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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곡황치술묘갈명(丹谷黃致述墓碣銘)
단곡(丹谷) 황치술(黃致述)의 묘갈명(墓碣銘)
어느날 황화석(黃和錫)군과 황용석(黃龍錫)군이 봉산(鳳山)의 남쪽에 있는 나를
찾아와서 그의 六代祖이신 참봉공(參奉公)의 묘갈명(墓碣銘)을 지어 달라고
청하는지라. 내가 늙고 병들어 지을 수 없다고 사양했으나 두 번 세 번 찾아와서
간청하기에 부득이하여 곧 그의 유사(遺事)를 상고해 본즉 공(公)의 휘(諱)는
치술(致述)이요 자(字)는 석운(錫允)이니 평해황씨(平海黃氏)가 동방(東邦)의
드러난 성씨(姓氏)가 된 것은 오래이다.
휘(諱)는 낙(洛)은 신라말기(新羅末期)에 벼슬이 상장군(上將軍)이었으며 휘(諱)
온인(溫仁)은 고려조(高麗朝)에서 벼슬이 검교(檢校)였고 휘(諱) 응청(應淸)은
조선조(朝鮮朝)의 선조(宣祖) 27(二十七)년 갑오(1594(一五九四))에 학행(學行)으로
부름을 받아 진보현감( 寶縣監)에 제수되고 명계서원(明溪書院)에 제향되고
있으며 세상에서 대해선생(大海先生)이라고 일컬는다. 아들은 거일(居一)이니
학문(學問)과 행의(行義)가 높아 참의(參議)에 증직(贈職)되었고 그 아들 중신(中信)은
호(號)가 노암(魯庵)인데 처음 영천(永川)에서 살게 되었으며
여헌(旅軒) 장선생(張先生)의 문하(門下)에 유학하여 생원(生員)으로서
성균관(成均館)에서 살며 학문을 닦을 때에 단독(單獨)으로 그 당시의 그릇된
시론(時論)을 배척하는 글을 올려 사람들이 모두 그를 대단한 선비라고 했다.
아들의 휘(諱)는 연(𨬔)이요 호(號)는 죽람(竹覽)이니 인조(仁祖) 때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또 문과급제(文科及第)로 뽑혀 벼슬이 사간(司諫)이었으며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贈職)되었다. 그 아들의 휘(諱)는 영하(永河)이니
문의현령(文義縣令)을 지냈고 호(號)는 보강(寶岡)인데 공(公)에게는 고조(高祖)가 되신다.
증조(曾祖)의 휘(諱)는 수길(壽吉)이니 청주목사(淸州牧使)를 지냈고 호(號)는
청재(淸齋)이며 조부(祖父)의 휘(諱)는 인묵(仁默)이요, 아버지의 휘는 운남(運南)이며,
어머니는 영천이씨(永川李氏)로서 죽곡리(竹谷里)의 집에서 공(公)을
낳았다.
공(公)은 천성이 순후하고 공손하며 검소했으며 서당(書堂)에 취학하여서는 여러
아이들과 더불어 서로 다투지 않고 학업(學業)에 전념하여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히 공부했다.
효도로써 어버이를 섬겼고 동족(同族)에는 화목했으며 치산(治産)에 부지런히
힘쓰면서 가문(家門)이 증세(中世)에 쇠퇴한 것을 생각하고 선대(先代)의 유업(遺業)을
계승하도록 힘썼다.
또 불쌍한 사람을 구제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향중(鄕中)에 칭찬이 자자했으며
정종(正宗) 18(十八)년 갑인(1794(一七九四))에 통덕랑(通德郞)의 품계로
명릉참봉(明陵參奉)이 제수되었으며, 만년(晩年)애는 단곡(丹谷)에 작은 초막(草幕)을
짓고 유유자적(悠悠自適)하며 살다가 세상을 마쳤다.
임종(臨終)이 되어 자제(子弟)들을 경계하는 말에 너희들은 각각 가문의 규율(規律)을
지켜 나가는 일을 길이길이 바꾸지 말도록 하라고 했다.
묘(墓)는 공덕곡(公德谷)의 자좌(子坐)의 둔덕에 있으며 배위(配位)는 공인(恭人)인
완산이씨(完山李氏)인데 군수(郡守)를 지낸 서화(瑞華)의 따님이며 규증(閨中)의
법도가 있었으며 묘는 같은 둔덕의 같은 좌향에 부장(葬)했다.
아들은 유해(騮海)와 일해(馹海)와 준해(駿海)와 봉해(鳳海)이며 유해(騮海)의 아들은 대연(大淵)이고
일해(馹海)의 아들은 도연(道淵)이며 준해(駿海)의 아들은 성연(性淵)과
지연(智淵)이고 봉해(鳳海)의 아들은 기연(基淵)과 두연(斗淵)과 계연(啓淵)이며
나머지는 기록하지 않는다.
공이 옛날부터 명망(名望)이 있는 가문(家門)의 후예로서 궁벽(窮僻)한 깊은
산골에 살면서 근검(勤儉)하고 효도하고 화목한 행의(行義)를 독실(篤實)하게
닦아 선대(先代)의 세업(世業)을 계승하고 후생(後生)을 위한 좋은 계책을 남겼으니
공이 공다운 행의(行義)를 상상할 수 있다.
이리하여 명(銘)을 하노니 명(銘)에 가로대
纘修先美
天卑剛兮
裕啓後謨 후손의 계책을 열어주니
家道昌兮 가도(家道)가 번창하고
德谷淸暢 공덕공(公德谷)의 맑고 화창하니
雙釖藏兮 쌍검(雙剣)을 감추었다.
潛蹟昭著 숨은 행적(行蹟)을 밝게 나타내었으니
百世光兮 백세(百世)토록 빛나리로다.
정해(丁亥)년 춘분절(春分節)날 이천(利川) 서석봉(徐錫宗)이 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