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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덕랑희구재황공묘갈략(通德郞喜懼齋黃公墓碣銘)
통덕랑(通德郞) 희구재(喜懼齋) 황공(黃公) 묘갈명(墓碣銘)
내가 기성(箕城)의 온천(溫泉)을 지나갈 적에 간절히 황효자(黃孝子)가 가래를 빨고 단지(斷指)했다는
말을 들고 희구재(喜懼齋)를 찾았더니, 사동(沙銅)에 2로(二老)가 번연(畨然)히 마루에 있는 60옹(六十翁)이 90옹(九十翁)을
종방(從傍)하여 귀에 대고 말하고 매사(每事)를 사주고 들이여 오희(娛戲)를 구아장(瞿兒狀)과 같이 함으로,
내가 그 독전(獨全)하는 부자(父子)의 낙(樂)에 복종(服從)하고, 또 황씨(黃氏)의 문(門)으로서 독행(篤行)한 사람이
많다. 이제 그 고(孤) 치홍(致泓)씨가 공(公)의 유덕(幽德)의 빛난 것을 나에게 보이고 그 사장(事狀) 1통(一通)을
대략(大略) 말하니 이것이 다 앞에서 들은 바다. 그 가(可)히 공경(恭敬)하고 가(可)히 쓴 바라. 삼가히
공(公)의 장(狀)을 검안하니 공(公)의 휘(諱)는 침(琛)이요, 자(字)는 군옥(君玉)이니 후(後) 개휘(改諱)는 유인(有仁)이라.
어려서
풍모(風貌)가 단결(端潔)하고 천품(天品)이 영민(穎敏)하여 어른을 사랑하는 마음이 천성(天性)에서 나오고
장성(長成)해서는 고공(做功)과 누점해액(屢占解額)이 일찍이 서로 응거(應擧)가 되어 서울에 갔을 때 한 관인(官人)이
있어 입을 물고 말하기를 만약(萬若) 모인(某人)으로서 등장(登場)을 하면 고과(高科)를 반드시 얻는다고
하니 공(公)이 모른척 가로대 궁(窮)하고 달(達)하는 것은 하늘에 있고 나에게 있는 것은
아니라 하였다. 일찍이 과시(科試)을 본즉 종신(終身)토록 과거(科擧)를 하지 못할망정 양친(養親)은
공경치 않을 수 없다하여 타사(他事)에 다황(多遑)하지 아니하고 부친(父親)이 동추(同樞)로서 공(公)이 늦어서
기이(期頤)1)의 수(壽)를 향(享)할 적에 몸에 편리(便利)하고 입에 맞지 아니한 것을 급(給)하지 아니하고
죽(粥)을 자(煮)하고 생선(生鮮)을 팽(烹)하고 온돌(溫突)에 불을 때고, 자리를 깔 때 자제(子弟)나 노비(奴婢)를 시키지
아니하고, 또 선비(先妣)의 묘소(墓所)가 10리(十里) 밖에 있으나 월(月)에 한번씩 주찬(酒饌)을 갖추어 항상
묘소(墓所)를 쇄소(灑掃)하는 데는 풍우(風雨)를 불피(不避)하더라. 금상(今上)(: 지금 임금) 무진(戊辰)에 동추공(同樞公)이 질수(耊壽)(: 80세)를 당(當)하여
공(公)의 힘으로 도하(都下)가 추어삼세(樞御三世)를 봉출(奉出)하니 은혜(恩惠)가 다 공(公)의 성력(誠力)에 미친 바다.
불행(不幸)이도 수상(壽觴)을 들지 못하고, 이해 5월(五月) 장공인(張恭人)이 병(病)으로서 일어나지 못하고
공(公) 역시(亦是) 윤5월(閏五月)) 12일(十二日)에 계서(繼逝)하시니 이날이 동추공(同樞公)의 즉세(卽世)라. 슬프다 천도(天道)가
무친(無親)에 항상 선인(善人)을 공(公)과 같이하니 가(可)히 선인(善人)이 아닐순가. 적은듯한 사이에
1영(一榮)하고 1췌(一悴)한 것이 가(可)히 믿어 할 바 못 되는구나. 그 생(生)이 원릉(元陵) 정묘(丁卯)
8월(八月) 2일(二日)이시고 향년(享年)이 62(六十二)라. 세병동(細柄洞) 직사원(直巳原)에 장사(葬事)하다.
전배(前配)는 행주전씨(幸州田氏)니 홍옥(弘玉)의
여(女)라, 단장정숙(端莊貞淑)하다. 선공(先公) 28년(二十八年)에 몰(歿)하셔서 군북지(郡北池) 하향(下向) 손좌(巽坐)의 원(原)에 장사(葬事)하다.
계배(繼配)는 울진장씨(蔚珍張氏)니 동옥(東玉)의 여(女)라. 군자(君子)의 협존(協尊)과 미덕(美德)이 있었다. 묘(墓)는 공(公)과
동원(同原) 이광(異壙)이시다.
사자(嗣子) 치홍(致泓)은 곧 명(銘)을 걸(乞)한 자(者)라. 3녀(三女)로 장(長)에 적(適) 이귀소(李龜熽)하고 차(次)는 적(適) 장천익(張天翼)으로 전씨(田氏) 소생이고, 계(季)는 적(適) 이병기(李柄器)로 장씨(張氏) 소생이다. 치홍(致泓)이 1남(一男) 석구(錫九)와 3녀(三女)로 장녀(長女)는 적(適) 권세전(權世銓),
차(次) 적(適) 박진규(朴鎭奎), 계(季) 적(適) 백희운(白憙運)이다. 이귀소(李龜熽)은 무자(無子)하고 장천익(張天翼)은 3남1녀(三男一女)가 있으니 남(男)에
석유(錫維), 석기(錫紀), 석현(錫絃)이요 여(女) 적(適) 황후연(黃厚淵)이고, 이상기(李相器)는 2남1녀(二男一女)가 있으니 남(男)에 학영(學榮)이고, 나머지는
유(幼)라.
황씨(黃氏)의 관(貫)은 평해(平海)니 그 비조(鼻祖) 낙(洛)이니 중조(中朝)에 학사공(學士公)이 바다에 떠서 동(東)쪽 바다로
오셔서 거(居)하였다. 고려(高麗) 때 휘(諱) 서(瑞)가 있어 벼슬이 시중(侍中)이고 시(諡)은 문절(文節)이라. 아조(我朝)에
입(入)한지 7대조(七代祖) 휘(諱)는 응징(應澄)이니 판결사(判決事)라 호(號)는 해창(海滄)이다. 6대조(六代祖) 휘(諱)는 여일(汝一)이요 호(號)는
해월(海月)이니 벼슬이 참의(參議)에 이르렀고 뒤에 공훈(功勳)으로 증(贈) 소재(小宰)이고 숙부(叔父) 대해선생(大海先生)과 같이
명계서원(明溪書院)에 향(享)하다. 5대조(五代祖) 휘(諱)는 중헌(中憲)이니 선교랑(宣敎郞)이시다. 고조(高祖)의 휘(諱) 석평(石平)이니
증(贈) 사복시정(司僕寺正)을 하시고 증조(曾祖)의 휘(諱) 숙(塾)이니 증(贈) 좌승지(左丞旨)요 호(號)는 구대(龜臺)라. 조(祖)의 휘(諱)는 세원(世元)이니 증(贈) 참판(參判)이시고 고(考)의 휘(諱)는 수하(受夏)니 효우행(孝友行)과 대질(大耋)로 동추(同樞)를 받고 이상(以上) 추영(追榮)을
받았으니 이는 다 공(公)의 수전(壽典)이라. 비(妣)는 안동권씨(安東權氏)니 만제(萬濟)의 여(女)라. 계비(繼妣)는 야성윤씨(野城尹氏)니
징삼(徵三)의 여(女)라. 함께 증(贈) 정부인(貞夫人)하시고, 공(公)은 계비(繼妣) 소생이다.
공(公)은 해방문헌가(海邦文獻家)에 나서 의표(儀表)의
수(秀)와 사륜(詞輪)의 몸이 막되게 큰 사람과 달라 의(義)를 앞세우며 바른 것을 지켜 과거(科擧)에
임시(臨試)하였으나 일찍이 과목(科目)이 폐지(廢止)되어 진취(進取)가 불구(不苟)함으로 마침내 일포의(一布衣)로서
도서(圖書)에 능(能)하여 영친(榮親)하는데 힘써서 은혜(恩惠)가 생전(生前)에는 얻지 못하였으니 이 역시(亦是)
슬프다. 그러나 행실(行實)이 향당(鄕黨)에 빛나서 신대부(紳大夫)들로 군(郡)을 주도(主導)한 자(者)들이 많이
애모(愛慕)하더라. 홍상서(洪尙書) 수보(秀輔)가 군(郡)으로 갈 때에 여러번 예의(禮儀)을 갖추고 자리를 배품에
유자(孺子)의 시접(待接)을 하였더. 재명(齋名)을 희구(喜懼)라 하고 공(公)이 만년(晩年)에 거소에 편액을 하였으니, 이는 늘 애일(愛日)하라는
뜻이라. 권학사(權學士) 준(晙)이 그 뜻을 아름답게 여기어 기(記)하고 명(銘)해 가로대,
敏於文而 문(文)에 민첩(敏捷)하나
不逐逐於 쪼치지 않고,
得喪敦於 상(喪)을 입을 적에는
行而恒層 행실(行實)이 돈독(敦篤)하고
層於孝養 속(屬)에 항(恒)하고 효(孝)에 양(養)하니
嗟哉黃公 슬프다 황공(黃公)이여
其董生老 그 동생(董生)과 노영자(老榮子)의
菜子出倫 출륜(出倫)일진저.
乎然世無 그러나 세상(世上)에
韓公作行 한공(韓公)의 작행(作行)과
朱先生錄 주선생(朱先生)은
之小學嗟 소학(小學)에 기록(記錄)하였으니
哉黃公沒 슬프다 황공(黃公)은 몰(沒)하였으나
柰世而名 이름은 내가 가(可)히 알 것이다.
湮事實尙
觀於喜懼
吾知今之
太史氏欲
株公齋記
其人可知
嗟哉黃公 슬프다 황씨(黃氏)여,
其又何悲 그 또 어찌 슬플꼬.
상지(上之) 28년(二十八年) 정해(丁亥) 납월(臘月) 대한절(大寒節) 한양(漢陽) 조성복(趙星復) 찬(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