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보서(庚寅譜序)
경인보서
황(黃)씨의 본관이 평해라 함은 태고적인 역사이다. 우리 동방의 명문세가들과 함께 덕업과 문장이 아름다움을 짝하여
빛남이 연면하지 아니치 않으나 다만 병란으로 보첩을 실호하고 증빙할 문적이 없어 금계(錦溪)선생의 박식하심에도 오히려
자세치 아니하심이 있어 또한 해월(海月)선조의 초보에도 다만 의심으로 전함을 탄식하신 바 있어
보첩을 인판에 부치지 못한 이유라 하겠다.
그러나 국내의 제종들은 오직 시조는 학사공이라는 것만은 잘 아는 바 중간 세차의 계승이 능치 못함으로
각파에서 수록함이 자연, 다만 가보를 이루는데 불과함이라.
이러히 미진함을 이제 이 보사로 처음 완만함은
그간 병자(丙子)・임진(壬辰) 양란 이래 국정이 승평하고 민심의 순화가 오래인 고로 병란 중
잠적되었던 문적을 발견함은 흡사 공자(孔子)의 전한
옛 문적이 큰 배 머리에서 나온 것 같아 금양에 보소를 설치하고 보학에 능통한 일(鎰)씨를 주간으로 윤덕(潤德)씨를
더불어 보학에 궁금한 신적들을 찾아 이를 서로이 상고하고 증빙하여 드디어 합성 완보하니 이로서
금계선생의 자세치 못한 바를 자세함에 이르고 해월선생의 의심으로 전함을 밝힘이니
주간한 그네의 공이 어떠하였으랴? 우리 대종의 무엇보다 다행한
일이다. 비록 그러하나 모든 천하지사의 성함은 스스로 그 시기와 운수에 이름이 있음이오 어찌 사람의 능한 바라
하겠는가?
세상에 보사가 이루어진 처음부터 보서와 발이 이미 큰 문장가들의 솜씨로 부쳤으니 부족한 나의 식견으로서는
감히 덧붙일 생각조차 못할 일이나 보소에서 첨종장의 의논이 관향에 대한 말씀이 없음은 가하지 아니하다 함으로
부득이 두어줄 글로 아는 바를 기록하노라.
세 경인(庚寅)(1770) 10월 예손 사하(師夏) 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