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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방황필구묘갈략(察訪黃弼者墓碣略)
直旌善治東舍音垡馬渴山枕子原有馬鬣而封者曰察訪黃公諱弼者之墓公字景壽肅廟己卯生蓮洞京第英廟壬子登文科序陞至六品除大同道督郵芯未滿解歸于太白山春陽洞終身不求進用優老典進秩二品 正廟庚子十月八日壽八十二考終于舍音垡之正寢其先平海人襄武公諱希碩 太祖開國功臣六傳而吏曹參議諱瑞於公七世祖也曾祖諱得英承旨祖諱大元縣監考諱尚憲贈禮曹參判她順興安氏外祖曰永逸嘉善配旌善全有章女從封貞夫人生卒皆
찰방황필구묘갈략
先公三年一年墓同山艮坐男在中允中俱郎階通德女適士人姜是在中男雄允
中男樸洙清晚清繼清雄出始清仁清致清樸出公生右文際 熙朝輒登巍科如
拾地芥非其中苑有所抱足以彪炳照輝乎巨匠諸公之耳目不能然也使少附青
雲之士圖進取則無論其尊官厚祿終亦自列於當時議論之林而馳譽於後世學
士大夫之口也決矣顧乃鴻飛木枯沒身蹈光而不少槩見豈亦有所懲者存而從
吾之所好歟方其捷遲隱淪興會於泓崢動靜之際情忘乎賢邪進退之途青松白
鹿金玉軒冕不知孰為貴孰為賤而吾所守而全歸者天之賦親之遺也觀夫自號
西惠約隱蓋可見矣然存心忠孝肆力經傳推以及於獎育後進思興儒化於寂寞
荒陬則又非沮溺輩長往忘世之所出鳴乎其賢矣彼饕貪勢利冒進而不知止者
卒至禍國害民名戮辱而不隱不然者又冥心山巓水涯外仁義蔑道德自居抗雲
霄而不省其陷溺之甚視公果何如也然則謂公為扶臣節衛聖門未為過也公所
著詩文為籌攸灾後人無所於考德無乃造翁體公韜晦素志而故為是劇耶是可
憾也晚清子塽率其三從孫河源越大嶺走五百里命銘牲石余不能不朽人辭愈
固而請愈懇不能不銘銘曰解緩歸隱匪我果忘劬經造士愛及後昌天錫遐齡
王爵有章琢辭貞石永照無疆
吏曹參判光山金鶴洙撰
찰방황필구묘갈략
정선군청 바로 동쪽에 사음대 마갈산이 있고 그 북쪽을 누비고 누운 언덕 말갈기에 봉분이 있으니 이는 찰방 黃공 弼
耉의 묘라 공의 자는 景壽니 숙종己卯(一六九九)에서 서울 연동에서 생하고 영조壬子에 문과에 등제하야 관직이 六품계
에 승진되어 대동도 찰방을 제수받았으나 임기 만료전에 인끈을 풀어놓고 태백산 춘양동에 돌아와 종신토록 진용을 원
치않아 우로전의 은사를 입어 二픔계로 오르고 정조庚子十月八日에 수 八十二로 사음대 정침에서 고종하였다. 그 선계
는 평해인이오 양무공 휘 希碩은 공의 원조로 태조개국공신 평해군이오 六대를 내려와 이조참의 휘 瑞는 공의 七대조라
증조의 휘는 得英이니 승지요 조의 휘는 大元이니 현감이요 선고의 휘는 尚憲이니 증예조참판이요 선비는 순흥안씨이니
외조는 永逸이요 관은 가선이라 배는 정선 全有章의 여요 공의 품계를 따라 봉 정부인하니 공보다 三년전 생하고 一년
전 졸하였으며 묘는 같은산 艮좌원하니라 슬하에 二남을 두었으니 在中 允中이라 모두 통덕랑이라 여는 사인 姜湜에게
출가하다.在中의 아들은 槤이오 允中의 아들은 樸이라 洙清 晚清 繼清은 槌의 소생이요 始清 仁清致清은 樸의 소생이
다. 공이 우문에서 나서 聖明朝庭에서 단번에 문과에 으뜸으로 뽑히되 꼭 땅에서 검불을 줍는듯이 하였으니 그흉중에
싸인바가 많치않고서야 어찌 표병조휘함이 이와 같겠는가? 진실로 웅문대가에 이목 이라도 능히 이렇게 평하지 아니치
못하리로다.어릴때부터 청운에 뜻을 두고 진취할 의도만 가졌다면 관직의 고하나 질록의 후박은 논할것 없고 끝내는
자연히 물망에 오르내리다.후일에 학사대부의 자리는 획득하였으리라고 단언하겠으나 그럼으로 다시 그의 심중을 추리
해볼때 올바른 도리를 행하기 위하여는 세상 영달을 잊고 세속에서 멀리 떨어진 경지에 몸을 두고 초목과 같이 썩을지
라도 조금도 마음에 구애됨이 없는 그 어떤 신비의 체험에서 얻어진 결론으로 매진한것인지도 모르겠도다. 바야흐로 벼
슬하지않고 자행자지하며 세상을 피하여 무아상태에서 신인합일 경지로 화평과 희락을 누리고 또 때로는 높은산 깊은물
의 동정에 감회하니 조정의 현사진퇴는 관심이 없고 또는 금관자 옥관자 청송백록을 무늬놓은 초현홍포등 귀인의 화려
한 의상과 장식이 아지못할게라 어느것이 귀하고 어느것이 천한가? 그러나 내가 지키고 온전히 가야할것은 天賦의 善
性과 조상들이 남긴유업 효우충신은덕의 길뿐이니라 무릇 스스로 호를 西愚라 한것을 볼지라도 검약과 은둔한 생활을
가히 보겠도다.그러나 충효에 유심하고 경전에 힘을 기울여 나아가서 후진을 장육하여 유교사상을 일으켜 교화가 적막
한 산간과 황망한 해추에 까지 취급하였으니 長沮 桀溺의 무리와 같이 忘世獨往한것도 아니니 오호라 현인이였도다. 대
저 권세와 명리를 탐하야 염치없이 나아갈줄만 알고 그칠줄을 모르는 자 그 종말은 나라에 화를 더하고 백성에게 해를
끼치고 자신의 이름을 더럽히고 인생을 구원치 못하느니라 그렇지않으면 산상에서 해변에서 마음을 어둡게하여 인의를
외면하고 도덕을 무시하며 하늘에 오르고 구름을 잡는듯이 과대망상증에 빠지는 것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것이 보통
이어늘 그러면 공은 어떠하였는가? 진실로 공은 세속에서 초연함을 알수있도다.그런즉 공이 만약 신절을 잡고 조정에
서 계속 시위하였더라면 잘못이 아니였으리라 생각하노니 공이 지은 詩文이 화재로 소실되었으니 후인이 다시 그 덕성
을 생각하고 면구할 근거가 없어졌도다.이것이 조물주가 공의 본뜻이 그 재질이나 학문을 나타내지 않으려는 것을 잘
아는데서 온 희극이 아니었는지 모를 일이로다.晚清의 아들塽이 그삼종손 河源을 대동하고 태산준령을 넘어서 五百里
를 달려와 갈명을 지어 줄것을 청하는지라 나는 죽은 사람을 썩지않게할 능력이 없음으로 고사하였다. 그러나 재삼간청
이 극진함으로 피치못하여 명을 짖노라 銘왈 인끈을 풀어놓고 돌아와 은거하나 세상을 저버리고 잊으려는것은 아니다.
경전을 힘써 배우고 학문을 깊이 닦아서 후배들이 흥창하게 함이로다. 하늘이 목숨을 길게 해주시고 나라의 임금이 벼
슬을 내리시도다. 아름다운 비석에 빛나는 행적을 새기니 길이 비추어서 무궁하리로다.
이조참판 광산 金鶴洙 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