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해군묘각중건기(平海君廟閣重建記)
평해군 묘각 중건기
선조 양무(襄武)공은 휘자가 희석(希碩)이오 성은 황씨(黃氏)며 평해 지방의 대족이니라.
이태조(李太祖)께서 건국할 때 순충분의 좌명 개국공신하여
봉 평해군(平海君)하고 시호를 양무(襄武)라. 태조(太祖)께서 자주 이르기를
과인의 몸이 오늘날을 얻을 수 있음은 모두 경의 슬기로운 정책의
힘이니라. 이로 인하여 공신록권과 훈장으로 대여며, 자손 등에게 만약의 경우
사면하겠다는 맹약을 하였으며, 인하여 국재로써 서울의 이현에다가 불천지묘위를
세워 4계절 향사를 궐함이 없더니, 시운이 불행하여 선조 임진(壬辰)에 왜란을
겪은 뒤 6세손 창(琩)이 주손 윤신(潤身)과 더불어 갈력주선하여,
충청도 청안 고을로 사당을 옮겨 세웠으니 청안 고을은 곧 사대부들의
기북지지니라. 명산과 운수 헌당과 정각이 즐비하여 타향의 부러움이러라.
그중에 평해군(平海君) 묘각이 또한 하나니라.
계룡산 낙맥이 둘러 쌓였고 앞에는 사비수가 구비쳐 돌았으며, 좌우로 펼쳐진
들판은 별유경계니라, 하오나 세월이 흘러 년도가 깊어짐에
묘각이 부패됨이니 모든 후손들이 크게 두려워 함이었나니, 이러함으로써 부득이
인모(麟模)가 주손 원구(元九)와 고심으로 난망상의하여 노고를 아끼지 아니하고
찬물을 건너 태령을 넘나들어 각지각향을 두루돌아 품고하니,
흩어져 있는 족인들이 힘을 모아 다 합침에, 그 힘이 그로모여 미친 바 되어
본시 묘우가 중건됨이니, 적막하기만 하였던 어잿 날의 대구가 모두 다함께 봄눈처럼
녹아내림은 옛 것을 다시 보임이니라. 비로소 금년 봄에 와서는 빈객이
속속 다투어 모임에, 성대한 낙성을 이루었더라.
하물며 우리의 자손 중에도 역시 난 사람은 있노라. 이러한 선조의 묘각이 다시 일어나
영원한 장래에도 가시덤불이나 초동의 목장은 되지 않을지니, 이로써 선조를
받드는 치성이 더욱 합쳐 구원의 존령을 위로하고 사모한다면 후손들의 쾌함이
아니리오.
하루는 영호(永浩) 족숙과 인모(麟模) 족제로 더불어 갈현의 초막에
나를 찾아와 묘우 중건기를 부탁하니, 내 나이 늙었노라 글이 되지 않음이니
어찌 감당하리오. 그러나 다 같은 자손의 처지요 어찌 감히 사향할 수
있으라 하여, 듣고 본 바를 간략히 서술함이 우와 같이 뵈임으로써
영원한 앞날에 잊지 않으리.
19세손 하모(夏模) 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