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류정황경신행장략(枕流亭黃敬身行狀畧)
침류정 황경신 행장략
공의 휘는 경신(敬身)이오 자는 직부(直夫)라 호는 침류정(枕流亭)이니 평해인이오.
휘를 희석(希碩)이라 하는 어른이 계시온데 태조(太祖) 건국에
추충협찬 개국원훈으로 평해군(平海君)을 봉하고 우의정하여 시호 양무공이라 즉 공의 7대조가 되시고, 6대조의 휘는 상(象)이오 태종(太宗)조의
부마 병조판서 겸 팔도 도총제 증 영의정이오, 5대조의 휘 계조(繼祖)는 통훈대부
수의부위 좌군 음사직이오, 고조의 휘는
자중(自中) 통훈대부 사복시정 대호군이요, 증조의 휘 전(詮)은 보공장군
행 선전관 증 통정대부 형조참의요, 조의 휘 세통(世通)은
어모장군 승 통정대부 형조참의 증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요,
선고의 휘 창(琩)은 선략장군 행 상주목사라, 선비(先妣) 숙부인은 하음 봉씨(奉氏)
양(樑)의 여(女)라.
공이 선조(宣祖) 2년(1569) 기사(己已) 11월 20일에 서울의 이현의
세가에서 생하시니, 자질이 청아하고
총명이 과인하여 나이 겨우 12세에 4서3경을 달송하며, 한번 들으면 곧 외우고
글을 지으면 사람들을 놀라게 하니,
가히 장자 이백(李白)과 백낙천(白樂天)을 압도할 사람이 될 것이라고 모두 칭찬하였다.
또 장성함에 기품이 돈후하야 화평하고 관유한
천성으로, 효성이 출천하야 혼정신성과 감지봉양하는 정성이 시종 게으르지
아니하여 가히 문증(文曾)에 비유하겠으나, 이름을
알리고 명예를 얻기 위한 행동은 일체 없었다.
무릇 군자의 덕을 심고 공을 닦는 것은 장차 후래에 남김을 위함이라 하고,
덕을 감추고 벼슬을 마다하니 뜻을 펴지 못하고, 가족과 행장을 거두어
청천 무릉동에 들어가, 도원 강상에 정자를 짓고 침류정(枕流亭)이라 편액하였다.
연이나 이(李)서계 득윤(得胤)과 기지상합하여 성리지학을 강마하며 우의가 더욱 두터워 옛날 사마백강(司馬伯康)간의
우애에 비길만하더라. 또 접객에 항상 화열과 겸손이 일관함으로 친함이
없는 이 없으며, 성품이 쾌활하여 수시로 시주의
흥취에 잠기는 등 고상한 생활을 즐겼고, 도는 숭조목족의 의(義)는 일생을
일관함으로 각읍 문중에 통유단자를 수집, 초보를
집성함이 침류정(枕流亭)공의 내인외화란 목족지성의 실이라 하겠다.
공이 일생을 걸어온 자취와 자기수행의 대략이 위와 같으며
효종(孝宗) 원년(元年) 경인(庚寅)에 정침에서 고종하니 향년이 83이라.
효종(孝宗) 2년 신묘(辛卯)에 증 통훈대부 절충장군 첨지 중추부사하니. 이는
특별 증첩이었다. 배위는 숙부인(淑夫人) 성주이씨(星州李氏) 첨정 원배(元培)의
여(女)라. 3남을 생하셨으니, 장왈 일(逸)이니 충의위사과요, 차왈 연(𢌪)이요,
3왈 규(逵)이라. 모두 착한 마음과 정직한 행실로 효도하고 우애하며
관대하니 원근향리에서 칭찬이 자자하더라.
공이 청천 무릉 도원 강변에 침류정(枕流亭)을 세우고 인망과 실존이
융숭하니 일향의 의절이 되었다 하더라. 나머지는 다 기록치 못하노라
후예손 의모(義模) 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