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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사황주하행장략(處士黃柱河行狀略)
처사 황주하 행장략
선고의 휘는 柱河요 자는 擎夫며 성은 黃氏니 계출이 평해라 신라 상세로부터 동방에 우러러보는 성씨로 관면혁세 즉
고관대작이 대대로 빛났으나 보첩이 소실되어 그것을 증빙할 자료가 없었다.그러나 여조에서 문장과 절행이 연면하야
가계를 능히 이어왔더니 太祖건국시에 개국원훈 平海君 휘 希碩이라는 분이 계셨는데 그가 곧 공의 十四대조가 되고 十三
대조의 휘는 麟 예조판서요 十二대조의 휘 致祖는 공조참의요 十一대조의 휘 吉源은 선공감정이요 十대조의 휘 坤은 예조
참의요 증조의 휘는 履謙이요 조의 휘는 璿이니 선균생원이요 전배위는 판서徐仁元의 孫女요 계배위는 진사 성주李致遠
의 孫女요 고위의 휘는 世俊이니 성균생원으로 경명행수 즉 경학에 밝고 행실이 착하여 세상에서 칭찬이 자자하였으며 배
위는 군수전주崔世珪의 女라 부군은 景宗壬寅(一七二二)에 서상 반송구제에서 생하셨다. 천성이 돈후하고 인품이 범상치
않으니 종족향당이 기특이 여겨 칭찬이 자자하였고 겨우 十세에 벌써 시를 짓고 학문의 높이가 만나는 사람을 놀라게 하
였다 부모를 섬기는데 효도로서 하고 친족들과는 화목으로써 하더니 十七세에 외간상을 당함에 단지 유혈로 최후까지 효
성을 기울이고 사후에는 애통호곡하며 三년을 소식으로 효를 나타내셨다.또 내간상을 만났을때도 역시 단지 유혈로 하
는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마침 종명에 이르자 애훼혼절하는 일까지 있어 전고을에서 출천지효라 칭하도다. 부군이 어릴때
양친을 잃고 백형 생원공 휘 運河에게 의지하더니 생원공이 그 뛰어난 재질을 가상히 여겨 학과를 힘쓰게하니 마침내 거
유가 됨에 경락의 공경들이 그 학식 덕망을 모두 사모하니 成참판德雨 洪승지彦喆 朴도정師喆등이 모두 선생님으로 존경
하였다. 당시 문암서원 임원으로 재임할때 李퇴계선생에 관한 축사할일이 있어 갔을때 미호 金撰善과 상론함에 있어서
언어가 정직하고 문답이 유리하니 金撰善이 외우로 존경하였으며 공의 지기가 강개하여 혼탁한 세속을 굽어보고 기탄하
는바가 없으니 속류배가 시기하고 미워하여 언어 잡으려 하되 조금도 굴하는 바가 없더라 만년에 속세를 떠나 살려는 뜻
이 있어 북중개명동에 은거하야 지팡이에 나막신으로 시냇가 낚시터에 방황하며 흥이나면 술잔을 기울이고 시를 읊으며
강개한 심사로 千년을 하루같이 보는 태연한 심정으로 지내며 또 때로는 다정한 말로 사람들을 접하고 때로는 엄숙한 언
론으로 세인을 격려하는 고로 비의와 탐음을 볼때는 호되게 꾸짖고 경계하며 멀리하더라 그리고 반가워 하는 것은 옛친
구요 친애하는 것은 친척이더라 배위는 첨지중추 여흥閔垕의 女라 六남을 두었으니 장에왈 尚樂 차에왈 尚穆 三에왈 尚
植四에왈 尚菊 五에왈 尚栗 六에왈 尚秀라 주갑壬寅에 졸하니 山林崔左海 만시에 왈 九發解可爲 一進士難得 향시에는 쉬
우나 한진사를 얻기는 어렵더라 진사李光鎭 만시에 왈 斷指絕誠 春色暮 驚人佳作洛城傳 단지하는 효성은 춘색이 저물었
고 사람을 놀라게하는 시작은 경향에 전하였더라 진사 梁德周 만시에 왈 以公志業 何不成爭道其門運再亨 공이 뜻한일이
어찌해서 이루지 못하리요 반드시 이루고 문운이 형통하리라 하였다.공의 유고가 세상에 빛나더라.
불초子 상목(尚穆) 근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