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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보서(庚寅譜序)
庚寅譜序
우리 平海黃氏는 建武 年代로 부터 비롯하여 現在에 이르기까지 一千七百四十餘年의
悠久한 歷史를 지니고 있다.
始祖께서 漢나라에서 배를 타시고 우리나라 東海岸의 平海 越松浦에 上陸하셨다는 말과
黃將軍이라는 어른께서 그곳에
松原을 造成하시고 계셨다는 말은 오랜 옛날부터 傳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니 더 말 할 것이
없거니와 우리의 祖上들은 저멀리 新羅時代로부터 高麗時代에 이르기까지 나라에 높은 벼슬과
貴한 所任를 맡으신 어른과 學問과 名望이 높으신 어른들이 代代로 聯綿히 이어 끊이지 않았지만
遺感스럽게도 그간의 文籍이 없어지고 또 譜牒마저 燒失되어 至今 이를 소상하게
考證치는 못하나다만 各者가 흩어져 산 그곳을 貫鄕으로 삼았던 것이다.
箕城에 本貫을 둔 者로 派系를 이은 根源을 찾을 수 있는 분은 오직 우리 金吾公으로
中祖를 삼으셨는데 李朝 中葉에 와서 나의 先祖이신 錦溪 先生께서 처음으로 널리 譜牒을
蒐集하여 草譜를 만들었고 그 뒤를 이어 海月 先生과 南塘 先生께서 修譜를 내셨던 것이다.
근자에 와서는 또 나의 從曾祖 處正 어른의 收錄과 三從叔 尙鍾 어른이 手寫한 기록은
勿論이고 史實을 證明할만한 證據를 널리 蒐集하여 完全한 譜冊을 이룩했으나 그를
刊行치 못하고 있던 中 長湍에 사는 일가 사람 燮이라는 분과 黃氏의 外孫이 되는
金汝綱이 合議하여 襄武公派譜 一卷을 印刷하여 가지고 千里를 멀다 않고 이 사람을
찾아와 그 譜冊을 提示했었다. 그 誠意와 勞苦는 참으로 대단했으나 그 記錄한 內容을 보니
派系와 順序가 그릇된 것이 적지 않기에 이것을
바로 잡기 위한 考證資料를 蒐集하느라고 二년이나 걸렸고 譜所를 豊基의 錦陽으로 옮긴
다음해 가을에 燮이 喪服을 입은
채로 泰山峻嶺을 넘어 豊基로 찾아와서 일가 되는 鎰에게 그 譜事를 맡겨 主幹케 하고
各有司를 定하여 各地方各派系의 收單을 모아드리게하였다. 그 後 六年이 지난 庚寅年
孟春에 譜冊을 印刷에 붙이니 비로소 譜事가 이루어진 것이다. 참으로 宗中의 慶事이며 多幸이
아닐 수 없다.
昔日에 海月 先生이 草譜를 만드실 때 評理公이 金吾公의 後孫이 되는 줄을 미 처알지 못하고
그 序文에 徒發未詳 一祖之歎이라고 하여 누가 과연 한 할아버지의 子孫인지 자세히 알 수 없음을
歎息한 것이나 지난번 長湍에서 譜冊이 新成되었으되
이 또한 大匡公의 倫序를 不察하여 당시 博識하고 뜻있는 선비들이 그 位次와 世系에 疑心을
품고 말해 왔었는데 이제야 서로 參考하고 究明하여 分明히 밝혀졌으니 즉 評理公이 金吾公의
後가 되고 大匡公이 評理公의 弟가 되는 것이다. 이로서 三派 序次와 昭穆行列의 秩序가
分明해졌으니 後世 子孫들의 유감이 없게 되었다. 이야말로 宗中의 多幸이 아닐 수 없다.
其他 附錄에 있는 諸派는 帳籍에 根據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既往의 舊譜에 빠진 것을 구태어
今番에 編入할 수 없기로 이는
後日을 기다릴 수 밖에 없다.
譜事가 다 이루어짐에 諸宗들이 潤九가 錦溪公의 宗孫이며 또 譜事에 參輿하여 始終을
들은 바 있으리라 하여 몇줄의 序文을 쓰라하니 宗事에 關한 일임에 敢히 不肯한 핑계로
辭退할 수 없어 이 글을 쓰는 것이다. 嗚呼라 우리 黃氏의 由緒가 오랜 歷史를 가진
宗族으로서 譜冊 중에 실려있는 先祖들 중에는 많은 분들이 勳業과 功德이 뛰어나
世人의 稱頌이 자자하니 宗族
後孫들은 이를 본 떠 따라야 할 것이다. 凡我諸宗과 後嗣들은 譜牒을 봄에 있어서
마땅히 서로 勉勵하여 祖上의 遺德을 욕되게 하지말 것이며 또 이렇게 하는 것이
譜牒을 完成한 同宗들의 힘쓴 功德에 보답하는 길일 것이니 각자 노력하기 바란다.
그리고 譜事 進行과 經費의 多寡등에 대하여는 나의 아우가 기록한 바를 卷末에 첨부하였으니
다시 附言치 않겠다.
上之(英祖) 四十六年 庚寅 孟春 後裔孫 潤九 敬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