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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3-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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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휴당황귀성행장(晩休堂黃貴成行狀)

<WRAP 33em justify> <typo ff:'한양해서'>  晩休堂黃貴成行狀
 공(公)의 휘(諱)는 귀성(貴成)이요 초휘(初諱)는 귀영(貴榮)이라 자(字)는 치장(致章)이요 호(號)는 만휴당(晚休堂)이라. 선세(先世)는 평해인(平海人)이니 학사(學士) 휘(諱) 낙(洛)의 후손(後孫)이며 개국(開國) 창업(創業) 공신(功臣)으로 삼도관찰사(三道觀察使)를 역임(歷任)하신 휘(諱) 천계(天繼) 호(號) 잠제공(潛齊公)의 8세손(八世孫)이다.

 공(公)이 나면서 바탕이 특이(特異)하여 기개(氣慨)가 높고 범상(凡常)치 않으며, 어릴 때부터 나의 선조(先祖)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선생(先生)의 문하(門下)에서 학업(學業)을 닦아 진취(進就)한 바 있더니, 기축년(己丑年)에 선생(先生)이 선조대왕(宣祖大王)의 부름을 받고 공(公)을 수행(隨行)케 하니 서울에 이르러 본 즉 왜사(倭使) 의지(義智) 현소(玄蘇) 등이 우리 나라 사람의 밀입국자(密入國者) 수인(數人)을 잡아 바치는 지라, 王이 가상히 여겨 불러보시고 환영연(歡迎宴)을 베풀어 주시는 지라. 공(公)이 서애(西厓) 선생(先生)에게 고(告)하되 왜사(倭使)가 온 것은 포망자(逋亡者)를 바치는데 본의(本意)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실상(實狀)은 우리 나라 형편(形便)을 탐정키 위(爲)한 것 이라 하였다. 과연(果然) 그 후 7년(七年)이 지난 경인년(庚寅年)에 다시 사자(使者)를 보내 명(明)나라로 진군(進軍) 위계(爲計)이니 통로(通路)를 빌리라는 통신(通信)을 하고 또 임진(壬辰) 4월(四月)에 왜병(倭兵)이 대거(大擧) 침입(侵入)해오니 조정(朝廷)에서 명(明)나라에 원병(援兵)을 청(請)하고 서애(西厓) 선생(先生)이 명장(明將)을 접대(接對)하기 위하여 평양(平壤)에 유(留)하시더니 이 날에 왜적(倭敵)이 벌써 평양(平壤)을 공격(攻擊)하는 지라.

 이때 공(公)은 서애(西厓) 선생(先生)과 함께 연광정(鍊光亭)에 올라 있었더니 홍의적(紅衣賊)이 가만히 모래 언덕에 숨어 조총(鳥銃)을 쏘거늘 공(公)은 편전(片箭)을 연발(連發)해서 적을 많이 상(傷)하였다.

 그 후 왕(王)의 행차(行次)가 정주(定州)에 이르러 의천(宜川)으로 환행(還幸)할 새 서애(西厓) 선생(先生)으로 하여 정주(定州)를 수비(守備)케 하더니 적장(敵將)이 군량(軍糧)을 약탈코저 양곡창고(糧穀倉庫)로 대도(大刀)를 차고 몽둥이를 휘두르며 사방(四方)에서 대거(大擧) 몰려 오거늘 공(公)이 말을 타고 활을 메고 크게 외치고 돌격(突擊)해 나아 가니 활시위 소리가 나는 곳에 적(賊)이 쓰러지는지라. 그 목을 베어 창고(倉庫) 길가에 달아두니 적(敵)의 무리가 간담이 떨어져 싸울 뜻을 갖지 못하고 도망하여 흩어지는지라. 이로 인(因)하여 정주읍(定州邑) 양곡창고(糧穀倉庫)는 보전(保全)되었다. 그 때 가뭄이 몹시 심(甚)하여 강(江) 물이 얕아지니 선생(先生)이 상류(上流)의 방비(防備)가 무너질까 염려(念慮)하고 변방(邊方) 수어(守禦)할 계책(計策)을 의논(議論)하며 공(公)으로 대정강(大定江)을 지키라 명(命)하다. 이를 지키는 중(中) 강변(江邊)에서 도망(逃亡) 온 군사(軍士)를 보고 혹(或) 평양(平壤)에 실수(失手)가 있지나 않나 의심(疑心)되어 공(公)이 이를 탐지(探知)한 즉 이미 평양(平壤)이 함락 되었는지라. 곧 이를 선생(先生)께 보고(報告)하니 선생(先生)이 대경(大驚)하여 즉시(即時) 공(公)을 보내 왕(王)의 임시(臨時) 행궁(行宮)에 상계(上啓)하였다. 그리고 장차 명(明)나라 구원병(救援兵)이 이르면 양곡(糧穀)과 사료(飼料)의 비축(備蓄)이 없으므로 선생(先生)이 근심하고 들으니 구성(龜城)에 양곡이 많이 있다 하니 공(公)과 종록(宗祿) 두 사람이 구성(龜城)에 가서 곡식과 사료(飼料)를 준비(準備)하라 명(命)하는지라. 두 사람이 구성(龜城)에 이르러 도망(逃亡)간 백성(百姓)들을 모아 국가(國家)의 위급(危急)함과 애국정신(愛國精神)을 고취(鼓吹)하여 불일지간(不日之間)에 많은 양곡(糧穀)과 사료(飼料)를 비축(備蓄)하고 원병(援兵)을 고대(苦待)하였다.

 그해十二月에援軍都元帥李如松이安州에당도하니先生이李元帥를보러가려하거늘公이先生에게아뢰기를처음만 날때李如松으로하여흐뭇하도록할計策을講究하시는것이좋을것이니充分한智略을짜라하였다先生또한같은生覺 을가져두분이充分한意見을交換하였다그리고先生이李提督을만나소매속에平壤地圖를내보이니李如松이朱線을 쳐가며仔細히살피고말하되倭敵의포로가눈앞에있는것이나다름없다하였다 明將祖承訓이安州에서敗戰하고돌아갈제公이先生의命을받들어술과飲食으로크게慰勞宴을베풀어주고自進退兵 하기를勸하니承訓이스스로敗戰한것을부끄럽게生覺하여遼東으로돌아갔다 明將李如松이進擊하여平壤을포위하니公이急히駱吳두將軍께勸하여一時에左右로挾攻케함에敵이견디지못하고 城內로몰려들어가거늘다시公이놈하되敵이城內로들어감은마치호랑이가함정에 빠짐같은格인데敵이궁한즉險惡 한反動이推測되는것이니敵이빠져나갈길을열어주고뒤로서소탕해버림이마땅하다하였다李提督이公의말을좇아 用兵했다 또西厓先生이公에게命하여江邊여울목지키는軍卒을監視하라하니江기슭을지나며絶句一首를읊으니詩曰 投筆操弓手亦高(투필조궁수역고)붓을던지고활을잡으니솜씨도높다 大同江水正滔滔(대동강수정도도)대동강수는옛과다름없이滔滔히흐르네 他時露布王城下(타시로포왕성하)他日에勝戰旗날리고王城下에돌아가면 欲挽銀河洗此刀(욕만은하세차도)銀河水(漢江水)를길러다피묻은칼을씻으리라 하니西厓先生이웃으시며壯士詩人이있다하더니오늘날에 그대를 보겠다하더라 正月에援兵이京城으로向할새解氷되어江을건널수없으매提督이浮橋를놓을것을命하는지라이에先生이公을불러 牛峰郡守李希愿과한가지로浮橋를놓는데必要한칡넝굴을끊어오라하거늘公이李郡守와議論하기를지금民力이퇴 폐해있는데强制로夫役을시키느니보다는먼저우리두사람이直接山에올라칡을끊는것이오히려民心을달래고感動 시키는結果가될것이라하고率先垂範하였더니遠近에사는百姓들이다투어칡을모은故로不日內에浮橋를이루었다. 四月에援軍이京城에들어와다시都城을회복하고王의車駕도회복할세公이扈聖즉王駕를호위한功勞로定略將軍의 官職을下賜받았다 戊戌十月에統制使李舜臣將軍이南海에서戰死하니先生이듣고크게놀라며슬퍼하였다그리고公으로하여代身弔問 케하니公도일찍부터李公과더불어忠義之心이相合하여莫逆之間이였는지라더욱哀惜히여기고몹시아파하였으며 李公의姪莞芬등과治喪之節을協議하여鄭重히葬事를치루었다 公은이해에職責을辭任하고故鄉에돌아와퇴폐해진舊臺를헐고數間의草堂을새로짓고그堂에晚休라縣額하였다後 人들이公에게歲祭享祀를謀策하고益陽書堂을建立하였다 通政大夫行校理知製敎兼經筵參贊官春秋官記注官豊山柳光睦謹撰

c3-041.1747222167.txt.gz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5/14 20:29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