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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적헌선생황한성묘갈명(取適軒先生黃漢成墓碣銘)

취적헌선생황한성묘갈명(取適軒先生黃漢成墓碣銘)
 취적헌(取適軒) 황공(黃公)은 즉 호성훈(扈聖勳) 정략장군(定略將軍) 만휴당(晩休堂) 휘(諱) 귀성(貴成) 공(公)의 제(弟)라. 백공(伯公)은 지용이 겸전하여 천하사를 담당할 재지를 가졌으며 계공(季公)은 경학을 배워 세속을 벗어나 초연한 이상을 가졌으므로 지금 향인들이 흠모마지 않는다.
 백공은 류문충공(柳文忠公) 서애선생(西崖先生)을 도와 임진왜란에 많은 계책과 계획을 진언하고 시석지중(矢石之中)에 동분서주하더니 무술(戊戌)년에 이충무공(李忠武公)이 남해에서 순국하니 문충공(文忠公)의 명을 받들어 대신 조전(吊奠)을 드리고 그 질(姪) 완(莞) 분(芬) 제씨(諸氏)로 더불어 동심치상(同心治喪)하였다. 그 후로 벼슬을 그만 두시고 고향에 은거하시니라.
 계공(季公)은 원래 명예와 공리에 뜻이 없어 취적헌(取適軒)이라 당에 현액을 걸고 백공(伯公)을 모시고 산수간을 소요하며 형제담락(兄弟湛樂)으로 자연의 신비에 심회를 새롭게 하더니 몰후 345(三百四十五)년에 그의 16(十六)세손 길영(吉永)이 족숙 중기(重起) 응기(應起)로 더불어 그 5(五)대조 문원(文源)씨(氏)의 찬한 유사를 기록하여 문중 부로(父老)의 명을 받들고 내게 와서 비문을 문의하거늘 나같은 견문이 없는 사람이 어찌 중임을 맡으리오. 누차 사피하였으나 특히 평일에 승모하기를 오래하던 바라 피치 못하여 이에 취적헌(取適軒) 선생(先生)을 쓰노라.
 삼가 살피건대 공의 휘는 한성(漢成)이요 초휘(初諱)는 한영(漢榮) 자는 치탁(致濯)이니 평해인(平海人)이라. 삼도관찰사(三道觀察使) 휘(諱) 천계공(天繼公)의 세손이요 고조는 선교랑(宣敎郞) 휘(諱) 문수(文壽)요 증조는 진사(進士) 장사랑(將仕郞) 휘(諱) 종사(從仕)이요 조는 생원(生員) 승의랑(承議郞) 휘(諱) 맹춘(孟春)이요 고는 통훈대부(通訓大夫) 휘(諱) 희손(熙孫)이요 비(妣)는 의성김씨(義城金氏) 천응(天應)의 여라.
 중종(中宗) 계측(癸丑)에 공이 인금동(仁今洞)에서 생하니 천성이 돈후하고 자질이 화순강명(和順剛明)하며 학문을 좋아하여 시문을 잘하고 경학에 깊은 이해가 많으며 구원(邱園)에 은거하여 등산과 낚시를 즐기며 이와같은 은거생활을 도리어 자랑삼고 유유자적하여 고인(古人)의 높은 뜻이 있더니 선조(宣祖) 갑진(甲辰)년에 침소에서 고종하니 향년이 62(六十二)세라.
 묘는 팔왕동술좌지원(八旺洞成坐之原)이요 배(配)는 의성김씨진구(義城金氏鎮九) 의 녀이니 공보다.. 五년 후에 졸하고 묘는 공의 묘에 부봉(해封)하였다. 남을 두었 는데 세림(世淋)이니 전사(進士)이다. 문행이 저명하며 자(子)로 용서(龍瑞)를 생하니 생원(生員)이요 생원이 드람을 두니 장은 유관(有觀)이요 차는 유직(有直)이라. 이하 는 다 기록하지않는다. 오 장하게도 공께서는 많은 시문을 남기셨지마는 후인들이 이를 선양(宣揚)치 못하 고 화재(火災)로 소실하고 말았으니 통탄해 마지않는다.그러나 이것이 공에게 무슨 손익이 되리요. 그 고상한 인품과 치조를 가히 천재지하(千載之下)에서도 우러러 추 상할 수 있도다. 이어서 명(銘)하노라 江山鍾毓文武一庭(강산총육문무일정) 강산의 정기가 모여서 문무가 한 가정에 났도다. 世道榛棘抱器潛靈(세도신극포기장령) 세태인심의 가시밭같이 험난하여 큰 포부를 품 고도 영광(靈光)을 감추었네。 于堂于軒熒熒兩星(우당우헌형형양성) 만휴당(晚休堂)과 취적헌(取適軒) 형제분 두 별이 크게 빛났으니 敦掩其光有德必馨(수업기광유덕필향) 누가 감히 빛을 가리우리 덕있는 향기는 기리 전 하리라 高尚其事聳立亭亭(고상기사옹립정정) 고상한 그 유적이 높이높이 솟아있어 鬱攸何傷彤筆愈青(을유하상동필유청) 문헌이 소실되었은들 어떠하리 무공과 문학이 청사(靑史)에 빛났으니 後人必式宜作範型(후인필식의작범형) 후인에게 법식이 되어 마땅히 모범이 될지니라。 後學 鎮川 宋基植謹撰

c32-018.1749273000.txt.gz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6/07 14:10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