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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3-043

팔경당황처검행장(八警堂黃處儉行狀)

 八警堂黃處儉行狀
 공(公)의 성(姓)은 황(黃)이요 휘(諱)는 처검(處儉)이며 자(字)는 중소(仲素)니 평해(平海)에서 계출(系出)하다. 중조(中祖)의 휘(諱)는 온인(溫仁)이니 려조(麗朝) 태자첨사(太子詹事)요, 5대(五代) 후(後)에 휘(諱) 희석(希碩)이라는 분이 계셔 입(入) 아조(我朝)하여 태조(太祖)를 도와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봉(封) 평해군(平海君) 시(諡) 양무(襄武)라. 이 어른이 휘(諱) 상(象) 평조판서(兵曹判書)를 낳아 소도지란(昭悼之亂)으로 문천(文川)에 적거(謫居)하다 병사(病死)하고, 참의(叅議) 휘(諱) 계조(繼祖)에 이르러 한양(漢陽)으로 방면(放免) 귀환(歸還)하여 이현(梨峴)에 살더니, 자(子) 휘(諱) 자중(自中)이 관(官) 참의(叅議)로 휘(諱) 전(詮)을 생(生)하니 이 분이 공(公)의 5대조(五代祖)라. 고조(高祖)의 휘(諱) 세통(世通)이니 형조참의(刑曹叅議)로 이현(梨峴)에 세거(世居)하고, 문전(門前)에 석교(石橋)가 있는 바 참의공(叅議公)이 가교(架橋)한 고(故)로 지금(至今)도 세칭(世稱) 황참의교(黃叅議橋)라 한다.
 증조(曾祖)의 휘(諱) 창(琩)은 사과(司果)니 백공(伯公) 참의공(叅議公) 서(瑞)로 더불어 청안(淸安)에 우거(寓居)하다. 청안(淸安)은 조비(祖妣) 유씨(柳氏)의 고향(故鄕)이라. 그래서 군방동(群芳洞)에 거지(居地)를 정(定)하고 당사(堂舍)를 지어 당호(堂號)를 양한(養閒)이라 편액(扁額)하다. 여기서 은덕불사(隱德不仕)하니 당세(當世) 고위고관(高位高官)들의 많은 송시(頌詩)가 현판(懸板)에 게시(揭示)되었더라. 조(祖) 경신(敬身)은 중추부사(中樞府事)니 충북(忠北) 청천(靑川) 무릉동(武陵洞)에 이거(移居)하여 강변(江邊)에 정자(亭子)를 짓고 호(號)를 침류정(枕流亭)이라 하였다. 이도 또한 벼슬에 뜻을 주지 않고 이(李) 서계(西溪) 득윤(得胤)으로 더불어 친교(親交)를 두터이 하며 강론(講論) 탁마지락(琢磨之樂)을 가졌다 한다.
 배(配)는 이(李) 승지(承旨) 묵재(默齋) 문건(文健)의 손녀(孫女)요. 고(考)의 휘(諱)는 일(逸)이니 통덕랑(通德郞)이요, 배(配)는 병조좌랑(兵曹佐郞) 조휴(趙烋)의 여(女)이니 공(公)은 그의 4남(四男)으로, 계부(季父) 증(贈) 참의(叅議) 휘(諱) 연([日延])에 출계(出系)하고, 연([日延])도 또한 계부(季父)인 진사(進士) 휘(諱) 수신(守身)에 출계(出系)하였으며, 배(配)는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 노색(盧穡)의 여(女)요 판서(判書) 직(稙)의 질녀(姪女)라. 참의공(叅議公)의 배(配)는 선전관(宣傳官) 윤순(尹淳)의 여(女)요 판서(判書) 한준(韓準)의 외손녀(外孫女)라.
 공(公)이 숭정(崇禎) 기사(己巳) 3월(三月) 8일(八日)에 출생(出生)하니 날 때 영민하여 범상(凡常)한 아이들과 다르니 부모(父母)의 사랑이 각별(格別)하더라. 장성(長成)함에 한촌(漢村) 윤공(尹公)에게 학업(學業)을 닦다가 다시 우암(尤奄) 선생(先生)의 문하(門下)에 들어와 성리서(性理書)를 수학(修學)하고 도학(道學)의 요건(要件)을 듣고 선기옥형지제(璿璣玉衡之制) 즉 천체(天體)를 관측(觀測)하고 일월운행(日月運行)을 계산(計算)하는 기기(機器)에 대(對)하여 공(公)이 감여간륜도(堪輿間輪圖) 즉 천지방위(天地方位)를 측정(測定)하는 패철에 비유(比喩)하니 선생(先生)이 극구칭찬(極口稱讚)하기를 지혜(智慧)롭다 비유(比喩)함이여 가(可)히 천도(天道)를 말할 수 있도다 하더니, 무기(戊己) 연간(年間)에 선생(先生)이 침류정(枕流亭)에 와서 우거(寓居)하니 공(公)이 스스로 스승을 모시고 전(前)에 듣지 못하던 바를 듣고 사제지간(師弟之間)의 의(義)가 더욱 두터웠더라.
 공(公)이 만년(晩年)에 군방촌(群芳村) 양한당(養閒堂) 근처(近處)에 정사(享舍)를 지으니, 선생(先生)이 손수 팔경당(八警堂) 3자(三字)를 써서 현판(懸板)을 걸어주고 기문(記文)을 지어 주니, 대개 팔경(八警)이란 뜻은 愼默緩忍敬直謙固(신묵완인경직겸고)1)인데 8자(八字)로 공(公)을 면려(勉勵)함이라.  그 후(後)에 선생(先生)이 동춘(同春) 송(宋) 선생(先生) 및 이(李) 상공(相公) 경억(慶億)으로 더불어 침류정(枕流亭)에 회동(會同)하고 공(公)이 또 권(權) 수암(邃菴)2)선생(先生)으로 더불어 함께 이들을 모시니 원근(遠近) 사람들이 듣고 보는 이가 현인군자(賢人君子)들이 모였다 하더라.
 갑을(甲乙) 연간(年間)에 우암(尤奄)이 흉도(凶徒)들의 모함을 당(當)하여 해도(海道) 중(中)으로 귀양가게 됨을 보고 동지(同志) 제생(諸生)으로 더불어 상소(上疏)를 올려 선생(先生)의 억울함을 밝히려 하더니, 그 뜻을 흔들고 말리는 자(者)가 있어 상소(上疏)를 드리지 못하니 죽을 때까지 유한(有恨)이 되었으며, 고묘지론(告廟之論) 즉 조정(朝廷)에서 전기(前朝)의 중신(重臣)을 처형(處刑)할 때는 종묘(宗廟)에 고(告)하는 묘의(廟議)에서 우암(尤奄)에 대(對)한 죄상(罪狀)을 흉도(凶徒)들이 발론(發論)하여 그 통문(通文)을 각도(各道)에 게시(揭示)하니, 공(公)이 노상(路上)에서 그 게시문(揭示文)을 보고 통곡(痛哭)하고 찢어버리니 흉도(凶徒)들이 더욱 악의(惡意)를 품고 공(公)의 명자(名字)를 8도(八道)에 통문(通文)하여 과거(科擧)를 보지 못하도록 하였다. 기사(己巳)에 선생(先生)의 후명지일(後命之日) 즉 왕(王)의 사약(賜藥) 처분(處分)이 있을 때에 공(公)이 90(九十) 편모(偏母)의 병환(病患)이 위급(危急)하여 집을 떠날 수 없는 고(故)로 멀리 나아가지 못하였으나, 스승의 상복(喪服)을 사제(私第)에서 입고 시신(屍身)이 돌아오는 날 분곡(奔哭)하고 평생(平生)에 지통지한(至痛之恨)이 되었다 한다.
 일찍이 모부인(母夫人) 윤씨(尹氏) 상중(喪中)에 있을 때 간혹(間或) 잠결에 생시(生時)와 같이였을 줄 일이 생각(生覺)나서 모부인(母夫人) 침실(寢室)로 들어가다가, 모부인(母夫人)이 계시지 않는 것을 깨닫고 영연(靈筵)에 들어가 실성통곡(失聲痛哭)하는 일이 있었으니, 이것은 공(公)이 어릴 때부터 윤씨(尹氏)의 교훈(敎訓)을 전적(全的)으로 받았고 특(特)히 윤씨(尹氏)는 시서백가(詩書百家)에 능통(能通)하여 자녀교육(子女敎育)에 전념(專念)한 분이었으므로, 공(公)이 평소(平素)에도 학문(學問)에 의문(疑問)이 생(生)할 때는 모부인(母夫人)에게 질정(質正)했던 연고(緣故)더라.
 공(公)의 천품(天稟)이 순수(純粹)하고 돈후(敦厚)하여 엄정(嚴正)하고 화평(和平)하며 관대(寬大)하나 위엄(威嚴)이 있으며 언론(言論)이 신중(愼重)하고 처사(處事)에 면밀(綿密)하며, 또 의리(義理)를 위하여 용감(勇敢)하여 남에게 성의(誠意)를 다하고 부모(父母)에게는 효성(孝誠)이 극진(極盡)하고, 상제(喪祭)에 있어서는 예제(禮制)를 엄격(嚴格)히 준수(遵守)하여 선조(先祖)의 제사(祭祀)를 차손(次孫)에게 돌리지 않고 단독(單獨) 봉사(奉祀)하며, 종족척당(宗族戚黨)을 어루만지며 도와주고 은혜(恩惠)롭게 돌보며 급박(急迫)한 재난(災難)이 있을 때는 주선(周旋)을 몸소하며 상사(喪事)의 슬픈 일에는 위문과 제문(祭文) 조례(弔禮)같은 정례(情禮)를 갖추고, 원근간(遠近間) 친구(親舊)의 부음(訃音)을 들은 즉 자리를 펴고 예곡(禮哭)을 하였으며, 비록 늙어서 병환(病患)이 있어도 시종(始終) 변(變)함이 없고 항상(恒常)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 빗고 의관(衣冠)을 정제(整齊)하고 책상(冊床)앞에 단정(端正)히 앉아 고서(古書)에 잠심(潛心)하며, 비루(鄙陋)한 폐담(廢談)을 입 밖에 내지 아니하며 태만(怠慢)한 빛을 신상(身上)에 두지 아니하며, 대인접물(對人接物)에는 훈훈한 봄바람이 감돌 듯하고 집에 항상(恒常) 빈객(賓客)이 끊이지 않으며 그 주식공궤(酒食供饋)를 하루 같이하고, 또 가법(家法)이 엄정(嚴正)하여 자제(子弟)들을 교훈(敎訓)하되 과(過)가 있으면 조금도 가차(假借)가 없으며 빈자(貧者)에게는 힘껏 도와주고, 형제간(兄弟間)에 우애(友愛)함이 천성(天性)에서 나오는 것인데 많은 족제족질(族弟族姪)들을 기출(己出)같이하고 종족(宗族) 중(中)에 빈궁(貧窮)해서 가취(嫁娶)를 못하는 자(者)는 공(公)이 반드시 담당(擔當)해서 때를 넘기지 않게 하고, 항상(恒常) 여혼(女婚)의 초례(初禮) 날에는 술을 마시지 않고 노래 소리를 듣지 아니하고 수연일혼례(愁然日婚禮)는 선대(先代)의 후사(後嗣)를 있게 함이라 대견스러운 마음이 있어야 한다하고, 근친(近親) 중(中) 사상(死喪)이 있을 때는 역시 영상범절(營喪凡節)을 힘껏 도와 대사(大事)에 유감(遺憾)이 없게 치루게 하며, 마음가짐이 공손(恭遜)하고 근엄(謹嚴)하며 윤리(論理)가 정직(正直)하여 선(善)을 좋아하고 악(惡)을 미워하는 것이 지극(至極)히 공변됨으로, 사람들이 존경(尊敬)하며 어렵게 여겨 감히 함부로 대(對)하지 못하더라.
 그리고 손수 일기를 쓰되 당시(當時)의 득실(得失)과 인륜상(人倫上)의 선악(善惡)을 직필(直筆)로 쓰고 죽는 날까지 하루도 간단(間斷)이 없어 마치 야사(野史)같았다 하더라. 만년(晩年)에는 특(特)히 예기(禮記)를 좋아하여 깊이 의미(意味)를 캐서 반드시 익숙한 해석(解釋)을 얻은 연후(然後)에 과정(課程)을 옮기니 공(公)의 공부(工夫)하는 태도(態度)가 늙을수록 더 독실(篤實)한 편(便)이었더라.
  장언적(張彦績) 찬(撰)

1)
신(愼): 삼갈 신
묵(默): 잠잠할 묵
완(緩) 느릴 완
인(忍): 참을 인
경(敬): 공경 경
직(直): 곧을 직
겸(謙) 겸손할 겸
고(固): 굳을 고
2)
권상하(權尙夏): 1641~1721
이조 숙종 때의 학자 자는 치도(致道). 호는 수암(邃菴). 한수재(寒水齋). 시호는 문순(文純). 집의 격의 아들이다. 1660년(현종 1)에 21세로 진사에 급제했으며, 일찍 송시열과 송준길의 문하에서 주자학을 공부하여 촉망을 받았다. 1675년(숙종 1)에 송시열의 갑인예송으로 덕원에 유배되자 후진배양에 힘썼다. 1680년(숙종 6)에 경신대출척으로 귀양에서 송시열이 돌아와 충청도 화양동에서 강학하자 송시열의 문하에서 10년간 정주의 저술을 교정하였다.
1689년 숙종 15년에 기사환국으로 송시열이 다시 제주도로 유배되어 사약을 받게 되자 송시열을 만나 이별을 고하고 책과 의복을 유품으로 받고 유언에 따라 화양동에 만동묘를 세우고 명나라의 신종과 의종을 모시었다. 다시 숙종의 뜻을 받들어 대보단을 쌓고 전기 두왕을 제사 하였다. 숙종의 충애를 받아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등의 벼슬까지 하사 하였으나 끝내 모두 사양하고 관직에 오르지 않았다. 그는 송시열의 직전에 이은 기호학파의 대유로서 세인의 추앙을 받았다.
c3-043.txt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5/27 20:58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