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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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묘대동보서(辛卯大同譜序) (1831년)] - 도(燾)=== | ===신묘대동보서(辛卯大同譜序) (1831년)] - 도(燾)===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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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辛卯大同譜序**\\ | \_**辛卯大同譜序**\\ | ||
- | 生民所重莫大於表姓氏聯族都姓者祖宗之所自出而受某姓也氏者子孫 | + | 生民所重莫大於表姓氏聯族䣊姓者祖宗之所自出而受某姓也氏者子孫 |
- | 之所由分而貫其鄉也士族之家必貴修譜為其明統緒於古今存親愛於悠 | + | 之所由分而貫其鄕也士族之家必貴修譜爲其明統緖於古今存親愛於悠 |
- | 久也成周之制置司商掌受姓立小史奠繫世氏姓世族顧何與於邦國之治 | + | 久也成周之制置司啇掌受姓立小史奠繫世氏姓世族顧何與於邦國之治 |
而建官設職若是其重且複何也惟其一人之化推於一家家而族族而國國 | 而建官設職若是其重且複何也惟其一人之化推於一家家而族族而國國 | ||
而之至於化成天下氏族之於聖王之政不輕而重有如是者奚翅一人一家 | 而之至於化成天下氏族之於聖王之政不輕而重有如是者奚翅一人一家 | ||
之私也昔遷固自叔其世起自重黎高頊歐陽公亦溯而至於大禹可謂遙遙 | 之私也昔遷固自叔其世起自重黎高頊歐陽公亦溯而至於大禹可謂遙遙 | ||
- | 之華而苟究其本人孰無玄遠之緒吾黃之受姓其來亦遠矣按中國姓彙陸 | + | 之華而苟究其本人孰無玄遠之緖吾黃之受姓其來亦遠矣按中國姓彙陸 |
終之后封黃因氏陸終顓頊之玄孫顓頊黃帝之孫而中國姓黃皆原於此吾 | 終之后封黃因氏陸終顓頊之玄孫顓頊黃帝之孫而中國姓黃皆原於此吾 | ||
- | 黃之先亦中國人意其為黃帝之苗裔歟漢之建武有諱洛始出東邦居平海 | + | 黃之先亦中國人意其爲黃帝之苗裔歟漢之建武有諱洛始出東邦居平海 |
- | 之越松後有孫兄弟三人因封立貫分為其城長水昌原之族而同根之誼遂 | + | 之越松後有孫兄弟三人因封立貫分爲其城長水昌原之族而同根之誼遂 |
蔑如矣蘇氏譜引曰其初一人之身也一人之身分而至於塗人蓋傷其世愈 | 蔑如矣蘇氏譜引曰其初一人之身也一人之身分而至於塗人蓋傷其世愈 | ||
遠而親愈疎也實獲吾宗今日之心也惟我箕城系籍經燹散失記載之存僅 | 遠而親愈疎也實獲吾宗今日之心也惟我箕城系籍經燹散失記載之存僅 | ||
- | 僅焉錦溪海月兩先生出而傳攷諸家遺籍旁搜遐裔逸乘积成草譜其追遠 | + | 僅焉錦溪海月兩先生出而傳攷諸家遺籍旁搜遐裔逸乘剏成草譜其追遠 |
收族之義殆發前所未發而猶存欠詳之歎後人追輯軼蹟之見於文字間者 | 收族之義殆發前所未發而猶存欠詳之歎後人追輯軼蹟之見於文字間者 | ||
- | 信點疑益致番慎逮庚寅而登之梓箕城之譜自此而始然方其譜也畿湖諸 | + | 信黜疑益致番愼逮庚寅而登之梓箕城之譜自此而始然方其譜也畿湖諸 |
- | 宗之為大匡派孫者成與同譜壽春興城之族均以襄武公第二子之裔共守 | + | 宗之爲大匡派孫者成與同譜壽春興城之族均以襄武公第二子之裔共守 |
- | 家譜訖無異馬近有翊賛宗氏胤錫得一碣於自家興城之墓起疑於十四世 | + | 家譜訖無異焉近有翊贊宗氏胤錫得一碣於自家興城之墓起疑於十四世 |
祖諱與官號遂別其載俱不入譜墓碣雖云可據旣非當位瘗誌之可以破惑 | 祖諱與官號遂別其載俱不入譜墓碣雖云可據旣非當位瘗誌之可以破惑 | ||
- | 者則舎前代相傳之牒從後世起疑之論得無率爾之譏乎兩疑相難不思所 | + | 者則舍前代相傳之牒從後世起疑之論得無率爾之譏乎兩疑相難不思所 |
- | 以為譜中世之懿德顯閥後承之分流派系將不得以傳諸來歟余庸是為懼 | + | 以爲譜中世之懿德顯閥後承之分流派系將不得以傳諸來歟余庸是爲懼 |
要存兩諱合成一譜興宗庶或諒余苦心重違家庭所聞莫肯歸一一祖之孫 | 要存兩諱合成一譜興宗庶或諒余苦心重違家庭所聞莫肯歸一一祖之孫 | ||
或漏或入寧不大可傷歎竊惟舊譜之刊己周一甲存者無幾生者日繁追廣 | 或漏或入寧不大可傷歎竊惟舊譜之刊己周一甲存者無幾生者日繁追廣 | ||
是譜益壽其傳實前人所望於後者也燾不揆僭猥肇于丙戌發書播告謀及 | 是譜益壽其傳實前人所望於後者也燾不揆僭猥肇于丙戌發書播告謀及 | ||
僉宗己丑之冬苦而宗人平海奎琯長湍周老豊基獻周江陵之璿春川默炅 | 僉宗己丑之冬苦而宗人平海奎琯長湍周老豊基獻周江陵之璿春川默炅 | ||
- | 永與升垕杆城瓚北青昇鍾會于京北收系編帙閱三載而乃克卒事若其詳 | + | 永與升垕杆城瓚北靑昇鍾會于京北收系編帙閱三載而乃克卒事若其詳 |
略原附之例一遵派牒之所自修不容折衷於其間也嗚呼庚寅之譜實寅錦 | 略原附之例一遵派牒之所自修不容折衷於其間也嗚呼庚寅之譜實寅錦 | ||
海二先生勞心精究兩邑諸宗協力同工則其於無忝之道共就此譜宜有所 | 海二先生勞心精究兩邑諸宗協力同工則其於無忝之道共就此譜宜有所 | ||
- | 別而豐之宗人偕議於始攜貳於後自歸向隅徐而究之其可日於心安乎否 | + | 別而豐之宗人偕議於始攜貳於後自歸向隅徐而究之其可曰於心安乎否 |
乎今若拘於議歧欺遽廢前譜中所己載則揆情度義有所恝然因舊登刊餘 | 乎今若拘於議歧欺遽廢前譜中所己載則揆情度義有所恝然因舊登刊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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噫古人有言無祿位而有君子族雖衰猶盛也祿位光榮而君子無聞馬族雖 | 噫古人有言無祿位而有君子族雖衰猶盛也祿位光榮而君子無聞馬族雖 | ||
盛猶衰也善夫言乎凡我同譜各勉孝悌忠信之道母曰姓能貴人而必思以 | 盛猶衰也善夫言乎凡我同譜各勉孝悌忠信之道母曰姓能貴人而必思以 | ||
- | 人貴姓則尊祖敬宗之本不外於是矣若但以稽本源班系派為務則豈今日 | + | 人貴姓則尊祖敬宗之本不外於是矣若但以稽本源班系派爲務則豈今日 |
- | 修譜之意亦豈所謂自一人推之族以至天下之化者哉剖劂告成宗人屬余 | + | 修譜之意亦豈所謂自一人推之族以至天下之化者哉剞劂告成宗人屬余 |
- | 為序余謝非其人而終不獲略述新續顛末庸付舊序之下\\ | + | 爲序余謝非其人而終不獲略述新續顚末庸付舊序之下\\ |
\_\_崇禎紀元後四辛卯臨月下澣\\ | \_\_崇禎紀元後四辛卯臨月下澣\\ | ||
- | \_\_裔孫通政大夫承政院右副承旨兼經筵參賛官春秋館修撰官燾謹識 | + | \_\_裔孫通政大夫承政院右副承旨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燾謹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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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ypo ff:' | + | <typo ff:' |
\_**신묘대동보서**\\ | \_**신묘대동보서**\\ | ||
- | 生民의 所重함은 姓氏를 표시하고 宗族이 사는 곳을 연결하는 것보다 더 클것이 | + | 생민(生民)의 소중(所重)함은 |
- | 없을 것이다. 姓이라는 것은 祖宗으로부터 이어 받은 것이고 氏라는 것은 子 | + | 없을 것이다. |
- | 孫들이 分派한데에 말미암은 바로서 그 閥族이 사는 地方을 貫鄕으로 삼은 것 | + | 밝히고 |
- | 이다. 士族家門에서 修譜하는 일을 貴히 여기는 까닭은 그 家門의 系統과 內歷을 | + | |
- | 밝히고 親愛의 情을 悠久히 이어가게 함에 있는 것이다。成周之制를 보면 司商을 | + | |
- | 두어 受姓을 管掌케 하고 小吏를 두어 繫世를 다루게 하였는데 氏性과 世族이 | + | 두어 |
- | 邦國之治에 무슨 관계가 있었기로 나라에서 이처럼 職制를 만들고 官員까지 두어 | + | 방국지치(邦國之治)에 무슨 관계가 있었기로 나라에서 이처럼 |
- | 이를 담당케 하였을까? | + | 이를 담당케 하였을까? |
- | 族으로 族에서 國으로 國에서 天下를 化成하는 즉 德化政治를 이룩하려든 것 | + | 족(族)으로 |
- | 이다. 氏族이 聖王의 政事에 이처럼 比重이 클진데 어찌 一人一家氏族의 私 | + | 이다. |
- | 事로운 일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 + | |
- | 옛날 司馬遷과 班固같은 漢나라 때의 史家들이 世紀를 叙述하되 重黎로부터 顓 | + | |
- | 頊에 이르기까지 黃帝의 孫이라 했고 中國의 黃姓이 모두 黃帝軒轅氏의 後孫 | + | |
- | 이라고 했으니 우리 黃氏의 先代 또한 中國人일진데 黃帝의 後裔가 아니겠는가 | + | |
- | 漢나라 建武年代에 諱를 洛이라고 하는 어른이 東方의 平海越松에 사시다가 後에 | + | |
- | 三兄弟를 두셨는데 각각 封爵을 얻어 貫鄕을 分定함에 따라 箕城長水昌原으로 | + | |
- | 갈리게 되어 同根의 誼가 드디어 없어졌으니 蘇氏즉 蘇軾의 譜뤼에 曰 처름 一人의 | + | |
- | 몸이 가지를 처서 마침내 길가는 사람처럼 서로 무관심하게 되어 버렸다 하였으니 | + | |
- | 이것은 대저 世代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점점 그 親함이 없어져가는 것을 嘆息한 | + | |
- | 말이니 참으로 吾宗의 오늘날의 心情을 그대로 나타낸 말이라 하겠다. 우리 | + | |
- | 平海黃氏의 系譜와 典籍이 兵火를 겪는 가운데 타고 흩어져 保存된 記錄이 僅 | + | |
- | 小하더니 錦溪海月兩先生께서 諸家遺籍을 널리 蒐集하고 詳考하셔서 빠진 家系와 | + | |
- | 文籍을 찾아내어 처음으로 草譜를 만드셨으니 그 遠祖를 追慕하고 宗族을 收合한 | + | \_옛날 사마천(司馬遷)과 반고(班固)같은 |
- | 意義가 자못 前人의 發想치 못한 것을 이루웠다 하겠으나 그 中에는 詳審치 못 | + | |
- | 한데가 없지 않아 後人들이 | + | |
- | 모아 믿을만한 것은 추리고 疑心나는 것은 버려서 더욱 慎重하게 心察하여 庚 | + | |
- | 寅年에 이르러 印版에 붙여 비로소 箕城世譜가 成就게 되었던 것이다. | + | |
- | 이렇게 처음 譜事가 이루어짐에 畿湖宗人들은 모두 大匡公派後孫들과 한가지로 | + | |
- | 同譜하기로 하고 또 壽春興城의 同宗들도 | + | |
- | 함께 하기로 하여 異論이 없었더니 近日에 翊賛宗氏胤錫이 한낫 墓의 誌石을 | + | |
- | 自家興城墓所에서 발굴하고 十四世祖의 諱와 官號의 의문을 일으키고 드디어 | + | |
- | 따로히 그를 記載하여 俱不入譜 즉 이번 譜牒에 들어가는 것을 願치 않으며 | + | |
- | 墓碣이 비록 믿을 만하나 當位의 誌石이 아미 保存되어 있어 파멸될 염여도 없는 | + | |
- | 것인데 | + | |
- | 것은 너무 輕率하다는 조롱이 없을는지? | + | |
- | 일이기는 하나 族譜를 위하는 우리가 中世先祖의 懿德顯閥과 後承의 分流派系를 | + | |
- | 後代에게 傳치 목함을 생각지 못하는가? | + | |
- | 나는 兩諱를 要存하여 一譜에 同合한다. 興城宗人들은 나의 이러한 苦心을 諒 | + | |
- | 解하기 바란다. | + | |
- | 家庭所聞에 어그러짐을 무겁게 여거 歸一함을 肯定하지 않는다면 一祖之孫으로 | + | \_한(漢)나라 건무(建武) 연대(年代)에 휘(諱)를 낙(洛)이라고 하는 어른이 동방(東方)의 평해(平海) 월송(越松)에 |
- | 或者는 漏落되고 或者는 入譜하는 | + | 3형제(三兄弟)를 두셨는데 각각 봉작(封爵)을 얻어 관향(貫鄕)을 분정(分定)함에 따라 기성(箕城) 장수(長水) 창원(昌原)으로 |
- | 겠는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舊譜가 刊行된지 벌써 一周甲이 넘었으니 그때 | + | 갈리게 되어 동근(同根)의 의(誼)가 드디어 없어졌으니 소씨(蘇氏) |
- | 일을 아는 | + | 몸이 가지를 쳐서 마침내 길가는 사람처럼 서로 무관심하게 되어 버렸다 하였으니 |
- | 繁盛해 가니 이 譜系를 넓히고 傳하기를 오래 하도록 後人에게 바라는 마음 간 | + | 이것은 대저 세대(世代)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점점 그 친(親)함이 |
- | 절하다. 燾는 외람함을 헤아리지 않고 일찌기 丙戌年에 글을 보내서 通告하고 | + | 말이니 참으로 오종(吾宗)의 오늘날의 심정(心情)을 그대로 나타낸 말이라 하겠다. \\ |
- | 僉宗들과 의논하며 계획하니 乙丑年 겨울에 뜻을 같이 하는 宗人平海의 奎○ | + | |
- | 琯長湍의 周老豊基의 獻周江陵의 之濬春川의 默炅永興의 升垕 杆城의 瓚北靑의 | + | |
- | 昇鍾등이 서울 北쪽 | + | |
- | 年만에 끝내었으며 그 내용의 상세한 記載例는 일채 派譜牒에 있는 대로 하였고 | + | |
- | 中間의 절충 같은 것은 許容치 않었다. | + | |
- | 嗚呼라 庚寅之譜는 실로 錦溪海月 두분 先生의 勞心과 精究에서 비롯되어 兩 | + | |
- | 邑諸宗의 協力과 합작으로 이룩된 것인즉 祖先의 遺業을 욕되게 아니하기 위 | + | |
- | 해서는 此譜에 | + | |
- | 가지로 論議하다가 나중에 貳意를 提起하여 물러가 버리니 곰곰히 생각해 보면 | + | |
- | 그 마음이 果然편할것인지? 참으로 알 수 없는 | + | |
- | 라섰다하여 이미 前譜中에 실려 있는 것을 빼내버린다면 情誼로 헤아려볼때 차마 | + | |
- | 못할일임으로 舊譜에 따라 印刷에 붙이기로 하는 것이니 나머지는 뒷사람들의 | + | \_우리 평해황씨(平海黃氏)의 계보(系譜)와 전적(典籍)이 병화(兵火)를 겪는 가운데 타고 흩어져 보존(保存)된 기록(記錄)이 근소(僅小)하더니 금계(錦溪) 해월(海月) 양(兩) 선생(先生)께서 제가(諸家) 유적(遺籍)을 널리 수집(蒐集)하고 상고(詳考)하셔서 빠진 가계(家系)와 |
- | 責任에 맡기겠다. 그리고 생각컨데 厚意를 存守하는 일단에 거슬리지 않는다고 | + | |
- | 스스로 믿는바이기는 하나 兩宗이 나에게 무슨 말을 할 것인지는 알 수 없다. | + | 문적(文籍)을 찾아내어 처음으로 초보(草譜)를 만드셨으니 그 원조(遠祖)를 추모(追慕)하고 종족(宗族)을 수합(收合)한 |
- | 古人이 말하기를 祿位가 없드라도 君子가 있으면 氏族이 비록 衰하는 것 같으나 | + | 의의(意義)가 자못 전인(前人)의 발상(發想)치 못한 것을 이루었다 하겠으나 그 중(中)에는 상심(詳審)치 못한 데가 없지 않아 후인(後人)들이 모르던 것들을 밝혀내어 문자간(文子間)에 나타난 것을 추가(追加)로 |
- | 오히려 繁盛하게 되어 祿位가 빛날것이며 君子가 없으면 비록 氏族이 繁盛하는 | + | 모아 믿을만한 것은 추리고 의심(疑心)나는 것은 버려서 더욱 신중(愼重)하게 심찰(心察)하여 경인년(庚寅年)에 이르러 인판(印版)에 붙여 비로소 기성세보(箕城世譜)가 성취(成就)게 되었던 것이다.\\ |
- | 것 같어도 오히려 衰한다고 했다. 眞實로 옳은 말이다. 무릇함께 이 譜冊에 | + | |
- | 列記된 모든 宗人들은 各自가 모두 孝悌忠信之道를 勉勵하고 姓이 사람을 貴하게 | + | \_이렇게 처음 보사(譜事)가 이루어짐에 기호(畿湖) 종인(宗人)들은 모두 대광공파(大匡公派) 후손(後孫)들과 한가지로 |
- | 한다 하지말고 반듯시 사람으로 말미아마 姓이 貴하게 여겨진다는 것을 生覺하기 | + | 동보(同譜)하기로 하고 또 수춘(壽春) 흥성(興城)의 동종(同宗)들도 모두 양무공(襄武公) 제2자(第二子)의 후예(後裔)로서 가보(家譜)를 |
- | 바란다. 尊祖敬宗의 本意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萬若祖上의 根源을 | + | 함께 하기로 하여 이론(異論)이 없었더니 근일(近日)에 익찬(翊贊) 종씨(宗氏) 윤석(胤錫)이 한낱 묘(墓)의 지석(誌石)을 자가(自家) 흥성(興城) 묘소(墓所)에서 발굴하고 14세조(十四世祖)의 휘(諱)와 관호(官號)의 의문을 일으키고 드디어 |
- | 考하고 派系를 分辨하는 것이 없다면 어찌 오늘의 修譜가 그 뜻이 있겠으며 또 | + | 따로이 그를 기재(記載)하여 구불입보(俱不入譜) 즉 이번 보첩(譜牒)에 들어가는 것을 원(願)치 않으며 또 |
- | 어찌 一人의 德化가 온 宗族에 추진되고 나아가서 온 天下가 德化함에 이른다 | + | 묘갈(墓碣)이 비록 믿을 만하나 당위(當位)의 지석(誌石)이 아미 보존(保存)되어 있어 파멸될 염려도 없는 |
- | 말할 수 있겠는가? | + | 것인데 선대(先代)로부터 전(傳)해오는 보첩(譜牒)을 버리고 후세(後世)에 의심을 낳는 물의(物議)를 좇는다는 |
- | 譜冊의 原槁를 印版에 붙이려고 윗사람들에게 報告를 할때 宗人이 나에게 | + | 것은 너무 경솔(輕率)하다는 조롱이 없을는지? |
- | 文짓는 것을 위촉함으로 이를 辭避치 못하여 新譜續刊의 | + | 일이기는 하나 족보(族譜)를 위하는 우리가 중세(中世) 선조(先祖)의 의덕현벌(懿德顯閥)과 후승(後承)의 분류파계(分流派系)를 |
- | 序아래에 붙이는 바이다.\\ | + | 후대(後代)에게 전(傳)치 못함을 생각지 못하는가? |
- | \_\_崇禎紀元後四辛卯臨月下澣\\ | + | 나는 양(兩) 휘(諱)를 요존(要存)하여 1보(一譜)에 동합(同合)한다. 흥성(興城) 종인(宗人)들은 나의 이러한 고심(苦心)을 양해(諒解)하기 바란다.\\ |
- | \_\_裔孫通政大夫承政院右副承旨兼經筵參賛官春秋館修撰官燾謹識 | + | |
+ | \_가정(家庭) 소문(所聞)에 어그러짐을 무겁게 여거 귀일(歸一)함을 긍정(肯定)하지 않는다면 일조지손(一祖之孫)으로 | ||
+ | 혹자(或者)는 누락(漏落)되고 혹자(或者)는 입보(入譜)하는 것이 어찌 크게 상심되고 탄식(歎息)할 일이 아니겠는가? | ||
+ | 일을 아는 사람은 살아있는 이가 몇 분 없고 그 후(後) 새로 출생(出生)한 사람들은 나날이 | ||
+ | 번성(繁盛)해 가니 이 보계(譜系)를 넓히고 전(傳)하기를 오래 하도록 후인(後人)에게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도(燾)는 외람함을 헤아리지 않고 일찍이 병술년(丙戌年)에 글을 보내서 통고(通告)하고 | ||
+ | 첨종(僉宗)들과 의논하며 계획하니 을축년(乙丑年) 겨울에 뜻을 같이 하는 종인(宗人) 평해(平海)의 규(奎)ㆍ관(琯), | ||
+ | 승종(昇鍾) 등이 서울 북(北)쪽 장단(長湍)에 모여 각파(各派) 명단(名單)을 수합(收合)하고 차서(次序) 편질(編帙)을 정리하여 3년(三年)만에 끝내었으며 그 내용의 상세한 기재(記載) 예(例)는 일체 파보첩(派譜牒)에 있는 대로 하였고 | ||
+ | 중간(中間)의 절충 같은 것은 허용(許容)치 않었다.\\ | ||
+ | |||
+ | \_오호(嗚呼)라 경인지보(庚寅之譜)는 실로 금계(錦溪) 해월(海月) 두분 선생(先生)의 노심(勞心)과 정구(精究)에서 비롯되어 양읍(兩邑) 제종(諸宗)의 협력(協力)과 합작으로 이룩된 것인즉 조선(祖先)의 유업(遺業)을 욕되게 아니하기 위해서는 차보(此譜)에 들어오는 것이 마땅할 것이어늘 풍기(豊基) 종소(宗所)에서는 시초(始初)에는 한가지로 논의(論議)하다가 나중에 이의(貳意)를 제기(提起)하여 물러가 버리니 곰곰히 생각해 보면 | ||
+ | 그 마음이 과연(果然) 편할 것인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지금 만약(萬若) 의논(議論)이 | ||
+ | 갈라섰다하여 이미 전보(前譜) 중(中)에 실려 있는 것을 빼내 버린다면 정의(情誼)로 헤아려 볼 때 차마 | ||
+ | |||
+ | 못할 일임으로 | ||
+ | 책임(責任)에 맡기겠다. 그리고 생각컨데 | ||
+ | 스스로 믿는 바이기는 하나 | ||
+ | 고인(古人)이 말하기를 | ||
+ | 오히려 | ||
+ | 것 같아도 오히려 | ||
+ | 열기(列記)된 모든 | ||
+ | 한다 하지말고 반드시 사람으로 말미암아 성(姓)이 귀(貴)하게 여겨진다는 것을 | ||
+ | 바란다. | ||
+ | 상고(詳考)하고 | ||
+ | 어찌 | ||
+ | 말할 수 있겠는가? | ||
+ | |||
+ | \_보책(譜冊)의 원고(原槁)를 인판(印版)에 붙이려고 윗사람들에게 | ||
+ | 서문(序文) 짓는 것을 위촉함으로 이를 | ||
+ | \_\_숭정(崇禎) 기원후(紀元後) 4(四) 신묘(辛卯) 임월(臨月) 하한(下澣)\\ | ||
+ | \_\_예손(裔孫)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承政院) 우부승지(右副承旨) 겸(兼) 경연(經筵) 참찬관(參贊官) 춘추관(春秋館) 수찬관(修撰官) 도(燾) 근지謹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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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004.1748172451.txt.gz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5/25 20:27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