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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의랑순흥훈도황공연지제단비(承議郞順興訓導黃公鋋之祭壇碑)
承議郞順興訓導黃公鋌之祭壇碑 公諱鋌姓黃氏其先平海人至公五代祖諱璡高麗檢校軍器監曾祖諱原老司錄參軍 寧海府使贈左副承旨自平海移居榮川草谷里祖諱瑾藝文館直提學 贈資憲大夫漢城左尹考諱有定文科資憲大夫工曹判書妣貞夫人奉化鄭氏刑部尚書云敬之 女洪武庚申生生員承議郞順興訓導自榮川復遷于豐基子孫遂爲豐人辛巳卒享年 七十二墓榮川郡南蟠谷亥坐原配恭人淸州鄭氏持平時之女文簡公福之孫也墓芝 川巽坐原生二男末孫宣敎郞司醞署主簿季孫一女適永川李塢直提學末孫子孝全 順陵參奉季孫子遠明學官守雲守全李子熙良司正參奉子鱓 義陵參奉觥觴鱓子 俊良號錦溪文科官至星州牧使遊退陶門早以文詞名於世晩躬性理之學疊疊不卷 大爲師門推許至沒先生手書棺上曰鳴乎亡友錦溪黃先生至撰狀行文刊行遺集享 郁陽書院次秀良亦遊陶山門號錦澗官富寧敎授以下不彈錄於乎公生聖祖龍興之 世席名父官業之庭其必有聞詩聞禮孝友慈仁之行而浩怯蒼茫杞宋無徵無得以推 尋當日事蹟庸非慈孫無窮之憾而椒聊蕃衍箕裘世傳至如玄孫錦翁先生的受寒栖 旨設不祧廟享菀然爲斯林之名家豈非公積累厚蔭之攸暨數後孫元變天變等委顧 弊盧謬囑以樂石之文自推老病不文實無以副應此事而契舊之地亦難終辭謹據譜 牒錄其序系子姓如右以塞基追先孝思之至意云契家後生永陽李龍九撰 檀紀四三二六年九月日後孫天燮謹書
승의랑 순흥훈도 황공 연의 제단비 공의 휘는 연(鋏)이며 성은 황씨이고 그 선대는 평해인이다. 공의 五대조(祖)의 휘는 진(璡)이니 고려 검교군자감(檢校軍資監)이었고 증조는 휘가 원로 (原老)니 사록참근(司錄參軍)으로 영해부사(寧海府使)증좌부승지(贈左副承旨)이니 평해로 부터 영천(현재 영주) 초곡리(草谷里)로 이사하여 살았다. 할아버지의 휘는 근(瑾)이니 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증 자헌대부한성좌윤(贈資憲大 夫漢城左尹)이요 아버지의 휘는 유정(有定)이니 문과(文科)에 올라 자헌대부공조판서(資憲 大夫工曹判書)요 어머니는 정부인(貞夫人) 봉화정씨(奉化鄭氏)이니 형부상서(刑部尚書) 운경 (云敬)의 딸이다. 공은 홍무경신(洪武庚申一三八○)년에 출생하였다. 생원(生員)으로 승의랑수흥훈도(承議郞順興訓導)이었다. 영천(榮川)에서 다시 풍기(豊基)로 이사하여 그 자손들이 이로부터 드디어 풍기사람이 되었다. 신사(辛巳一四六一)년에 서거하니 향년 七二세(八二세가 잘못된 것 같음)로 묘소는 영천군 남쪽 반곡리(蟠谷里) 해좌원(亥坐原)이다.배(配)는 공인(恭人)으로 청주정씨 지평(持平) 시(時)의 딸이요' 문간공(文簡公) 복(福)의 손녀인데 묘는 지천(芝川)의 손좌원(巽坐原)이다. 두 아들을 낳았으니 아들 말손(末孫)은 선교랑(宣敎郞)으로 사온서주부(司醞署主簿)요 또한 아들의 이름은 예손(季孫)이요 딸은 영천 이씨 오(塢)에게 출가하였으니 그는 직제학이다.
말손의 아들은 효동(孝소)이니 순능참봉(順陵參奉)이요 계손의 맏아들은 원명(遠明)이니 학관(學官)이며, 또 아들 수운(守雲)과 수동(守소)이 있다. 이오(李塢)의 아들은 희량(熙良)이인데 사정참봉(司正參奉)이다.손자 치(禪)는 의릉(義陵)의 참봉(參奉)이요 또 손자 굉(觥)과 상(觴)이 있다. 치(禪)의 아들은 주량(俊良)인데 호가 금계(錦溪)요、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성주목사(星州牧使)에 이르렀고、퇴계(退溪)의 문하(門下)에서 배웠다. 일찍이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렸고, 늦게는 성리학(性理學)을 궁구(窮究)하였다. 모든 일에 부지런하고 게으르지 않아 퇴계선생의 추허(追許)하는 바가 되었다.금계선생이 서거하게되자 퇴계선생이 직접 금계선생의 관(棺)위에 쓰기를 [오호 망우 금계 황선생 (嗚呼 亡友 錦溪 黃先生) 슬프다 돌아간 벗 금계 황선생]라고 하고 또한 퇴계 선생이 금계공의 행장(行狀)을 짓기도 했다. 금계공의 문집이 간행되었으며, 금계선생은 욱양서원(郁陽書院)에 배향되었고, 금계의 동생 수량(秀良) 역시 퇴계 선생의 문하에서 배웠는데 호가 금간(錦澗)이요 벼슬이 부령(富寧)의 교수(敎授)였다.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아! 공이 성스러운 임금의 태평성에 태어나서 훌륭한 유친(有定)아래 가정교육을 받으셨으니 기필코 시(詩)를 듣고 예(禮)를 들어서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현제간의 우애와 자녀에 대한 자애 이웃에 대한 사랑의 행적들이 있었을 터인데 오랫동안 난리로 인하여 재난을 당하여 증빙될 만한 자료가 없어 당시의 사적들을 추적할 수 없으니 어찌 사랑스런 후손들의 끝없는 유감이 아닐 수 있으리오.
자손이 번창하고 가업(家業)이 대대로 이어져서 고손자(玄孫) 금계(錦溪) 같은 이에 이르러서 적실(的實)하게 한서(寒栖)의 뜻을 받아서 부조묘향(不祧廟享 : 영원히 제사지내는 사당)을 설치했다. 그러니 성(盛)하게도 유림(儒林)의 명문가문이 되었으니 이는 어찌 공의 쌓은 두터운 음 덕(陰德)의 결과가 아니리오! 후손 원섭(元燮)과 천섭(天燮)등이 누추한 나의 집에 찾아와 빗돌에 새길 글을 지으라고 위촉하거늘 스스로 추리해 보건대 나는 이미 늙고 병들고 또한 문장이 신통치 못하니 실로 이 부탁에 부응할 수가 없겠으나 사귐이 오래된 처지에 또한 끝까지 사양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보첩(譜牒)에 의거하여 그 순서로 계통을 맨 자손을 기록하기를 앞에서와 같이 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 선조를 추모하는 효도 생각의 지극한 뜻을 채워주는 바이다. 교분있는 집의 후손 영양(永陽)이용구(李龍九) 짓고 단기 四三二六년 九월 일 후손 천섭(天燮) 삼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