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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농(愚農) 황공(黃公) 묘갈명(墓碣銘) 우농(愚農) 황공(黃公)이 별세하신 지 三十여 년이 가까운 동지달 어느날 그 자제
응기(應起)씨가 七十이 넘은 노령으로 내가 사는 영주 유당(由堂) 우사(寓舍)에 찾아 와 선대(先代)의 가장(家狀)을 나에게 보이면서 말하기를 「선대인(先大人)께서 가학 (家學)을 이어 가난함을 근심치 않고 경학(經學)에 힘썼으나 불행하게도 웅대(雄大) 한 뜻을 품고 산림(山林)에 묻혀 살게 되었습니다. 만년에 자제들에게 의(義)로운 방 법으로써 가르치고 능히 집안의 규범(規範)을 준수하시다가 세상을 마치셨습니다. 불초(不肖)한 제가 나이 七十이 넘어 지난날을 미루어 상고하건대 많은 잘못을 어찌 다. 감당하겠습니까 부군(府君)의 천추(千秋)의 묘역(墓域)이 황폐(荒廢)하고 침을(沈 鬱)하여 온갖 풀이 무성한데 어느 사이 늙음이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오직 원하는 것은 백대(百代) 일가의 의분(誼分)으로 은혜로운 한 말씀을 주시면 넉넉치 못한 가 문(家門)에 오랜 세월 바탕이 될 것이며, 세상을 살아가는데 큰 영광이 되어 어찌 몸 둘 곳이 있겠습니까。」한다. 나 또한 늙고 병든 몸이라 어찌 능히 이 일을 하겠는가 마는 하는 수 없이 그 행 장(行狀)을 살펴 서술하노니, 공의 휘는 병성(昞星)이요'자는 극서(極瑞)며、우농(愚 農)으로 차호(自號)하였다. 멀리 고려초에 관(官)이 금오위장군(金吾衛將軍) 태자검 교(太子檢校)이신 휘 온인(溫仁)이 관향(貫鄕)을 받은 상조(上祖)가 된다. 四대를 전 하여 휘 용(墉)은 관(官)이 삼중대광보국(三重大匡輔國)이며 시호(諡號)는 충청공(忠 敬公)이다. 공이 휘태백(太白)을 생하니 증 우의청(右議政)이요,휘우(祐)를 생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