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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간황봉규묘갈략(東潤黃奉奎墓碣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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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東潤黃奉奎墓碣略
公諱奉奎字良彦號東潤即瀛海上內行純篤之士也以 純廟壬午生卒於丙戌 其先平海人也麗朝有諱墉大匡輔國諡忠敬國 朝有諱天祥門下賛成歷十世 有諱衍童蒙教官於公八代祖也考諱景河嘉善妣平海孫氏允郁之女有婦德公 幼而穎悟五歲請學八歲受大學己解格物致知之義及長志高尚廢學業惟學問 是務非義營求不萌作於心用力亶在孝友忠信上持己若虚待人必恭而至於辦 義利明是非截然有不可犯盖其性然也遭 國恤不飲酒食肉丁內外艱初終葬 祭一遵家禮不梳髮不脫經服雖閡而每朔望必展墓不以風雨而廢鄉黨咸稱孝 子之門又有孝子己卯蒙 恩受資通政遂卜築于東坡上扁堂以東潤逍遙邱林 自娛經史以訓迪後進爲己任而當日士生斯世既不能舟楫大川黼黻皇猷當開 導後進與入堯舜之道是吾志也讀史至奸黨之娛國找賢及善類之失位竄逐未 當不擊節太息其氣節盖如此也憫于阨窮而不求人知辛勤樹德宜其子孫熾而 昌是可銘也己 銘曰孝統百行公有承受立志惟早確乎其守研窮經史翱翔邱 園樹德于躬用裕後昆斷刻斯石實昭無窮孰不瞻敬秉彝攸同
  通訓大夫行咸悅縣監德殷宋冑憲撰


 동간황봉규묘갈략
 공의 휘는 奉奎요 자는 良彦이오 호는 東澗이니 동해상에 순수독실한 덕행을 닦는 선비라 純祖壬午(一八二二)년에 생 이오 丙戌에 졸하니 향년이 六十六이라 그 선계는 평해이니 여조에 유휘 墉 삼중대광 시호를 忠敬 아조에 유휘 天祥이 니 문하찬성사요 十世를 지나서 유휘 衍하니 동봉교관은 공의 시대조라 선고의 휘는 景河니 가선이요 선비는 평해孫允 郁의 여로 부덕이 높아 향리의 칭송이 자자하였다.공이 어릴때부터 영민하여 五세에 입학하고 기세에 대학을 배워 格 物致知의 뜻을 능히 해독했으며 장성함에 지기 고상하야 과거공부를 버리고 오직 학문에 힘쓰되 信義외에 영리를 부당 하게 구하는 마음은 심중에 싹트지 못하게 노력하며 오로지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며 몸가짐을 빈것 같이 하여 사람을 접함에 반드시 겸손하고 공손하였다. 그러나 義와 利를 분변하고 是와 非를 밝힐때는 끊는듯이 연이한 판 단으로 추상같은 기상이어서 감히 복종치 않은이 없었다. 극상을 당해서는 주육을 먹고 마시지 않았고 양친의 상사와 제 사시에는 일체 가례를 준수하여 불소발 불탈질 즉 머리를 빗질않고 항상 상복을 입고 三년상을 다 치룬후에도 매월 상 망에는 성묘를 하되 풍우에도 폐하는 일이 없음으로 향당에서 모두 효자지문에 효자가 났다고 칭송하더라 己卯에 통정 에 가자하니 드디어 동파상에 당을 짓고 東澗이라 편액을 걸고 구학임천에 소요하야 스스로 경사를 즐기며 후진들을 교 흔하며 깨우쳐 주는것을 자기의 책임으로 생각하고 또 일찌기 말하기를 선비로 나서 不能 舟楫大川 黼黻皇猷 즉 큰 재 능이 있어 큰 사업을 하거나 제왕을 도와 위관충군 못할바에야후진을 개도하야 성현의 도에 따라가게 하는것이 나의 뜻 이라하고 또 사기를 읽을때 간당들이 나라를 그릇치고 어진사람을 죽이고 착한사람들이 지위를 잃고 축출되는 대문을 볼때는 주먹을치고 한숨을지고하니 그기절의 고상함이 이같으며 자기 개인의 험난과 곤궁은 조금도 근심하지 않을뿐아 니라 남이 그런것을 알아주기를 원치않으며 오직 권고하며 묵묵히 덕을 심는대만 힘을쓰니 마땅히 자손이 번창하리로 다。이로 가히 명하노라 銘왈 효도한 백가지 행실의 근본인데 공이 효의 도를 이어받았도다.그뜻을 세우는대 일찍 깨 달았으며 또한 그것을 지키는데 확고하였도다.경전과 사기를 연구하고 실천하는데 노력하여 邱園에서 심한진리를 깨달 았도다. 덕을 심고 몸소 행하여 세상에 보이니 닦은덕이 후손에게 넉넉히 끼치리로다.이돌을 깍아서 명을새기니 행실 이 밝게 함이 무궁하도다.누가 존경하고 우러러 보지 않으리오 인생의 윤리의 근원인 오륜을 그대로 지켰도다.
  통훈대부 함열현감 덕은 宋冑憲 찬

c-115.1746063682.txt.gz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5/01 10:41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