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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3-028

무술보서(戊戌譜序)

戊戌譜序
 보(譜)는 세계(世系)를 밝히고 소목(昭穆)을 변별(辨別)하는 것이니 세계(世系)가 밝은 즉 종파(宗派)와 지파(支派)의 분별이 정해지고 소목(昭穆)을 분변(分辨)한 즉 돈목지심(敦睦之心)이 생길 것이니 씨쪽(氏族)은 가(可)히 보(譜)가 없을 수 없다.
 오족(吾族)이 동방(東方)에 나오기를 학사공(學士公)으로 부터 비롯하여 평해(平海) 월송(月松)에 세거(世居)하였으나 문헌(文獻)의 증거(證據)가 박약하니 자손(子孫)으로서 기송지탄(杞宋之歎)1)이 없지 않으며 뒤에 3파(三派)의 자손(子孫)들이 각처(各處)에 산재(散在)하고 작위훈공(爵位勳功)과 문장덕행(文章德行)이 대대(代代)로 혁혁하여 울연(蔚然)히 동방(東方)의 대족(大族)이 되었다. 아! 그 성창(盛昌)함이여! 우연한 일이 아니로다. 우리 씨족(氏族)이 수보(修譜)가 병오년(丙午年)에 비롯하여 경인년(庚寅年)에 대동보(大同譜)를 수성(修成)하고 그 후(後) 기백년간(幾百年間)에 누차(累次) 중간(重刊)한 일이 있어 그 내용이 상략(詳略)과 존궐(存闕)을 혹 달리한 것이 있기는 하나 그 모두가 선부로(先父老)들의 노심초사(勞心焦思)한 것이다.
 갑술(甲戌年)에 대동보(大同譜)를 만든 이후(以後)로 장차 20 성상(二十星霜)이 가까웠으니 그간(間) 죽은 사람도 있고 새로 태어난 사람도 많으니 불가불(不可不) 다시 수보(修譜)치 않을 수 없어 정유년(丁酉年) 봄에 족숙(族叔) ○○2)씨가 수보(修譜)를 발의(發議)하여 전국(全國)의 각파(各派) 종중(宗中)에 두루 통고(通告)하고 이에 곧 충경공파보(忠敬公派譜)를 편수(編修)하게 되었다.
 상계(上系)는 일체 구보(舊譜)에 기재(記載)된 대로 하고 단(但) 동파(同派) 족인(族人) 중(中) 북한(北韓)에 있는 족친(族親)이 많으나 명단(名單)을 수합할 길이 없어 합의(合議)치 못하니 참으로 한(恨)스러운 일이라. 그리고 이 대사(大事)에는 의모(義模)씨가 대소(大小) 범백사(凡百事)에 감독(監督) 자임(自任)하지 않은 것이 없고 성의(誠意)와 힘을 다하고 적수공권으로 어려운 재정(財政)과 사무(事務)를 도맡아 하지 않았던들 어찌 이 거창한 일이 추진(推進)되었겠는가? 참으로 다행(多幸)한 일이었다. 인판(印版)에 즈음하여 내가 대광공(大匡公)의 주손(胄孫)이니 일언(一言)이 없을 수 없다 함으로 외람됨을 무릅쓰고 대략(大略)의 전말(顚末)을 우(右)와 같이 기술(記述)한다.
  무술(戊戌) 계추(季秋) 하한(下瀚) 예손(裔孫) 원구(元九) 근지(謹識)

1)
기송(杞宋):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하(夏)나라의 예(禮)는 내가 말할 수 있지만 (후신이라는) 기(杞)나라는 징험(徵驗)이 부족하고, 은(殷)나라의 예(禮)는 내가 말할 수 있지만 송(宋)나라는 징험(徵驗)이이 부족한데, 문헌(文獻)이 부족하기 때문이며, 충분했다면 내가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 논어 팔일(八佾)
2)
원문에는 빈 칸이나, 의모(義模)로 추정됨.
c3-028.txt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5/21 19:35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