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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志士 葛隱 平海黃公昞允之墓 | + | ===志士 葛隱 平海黃公昞允之墓=== |
+ | <WRAP 37em justify> | ||
+ | <typo ff:' | ||
+ | \_**지사(志士) 갈은(葛隱) 평해황공(平海黃公) 병윤(昞允) 지묘(之墓)**\\ | ||
+ | \_여기 고상(古上) 능근곡(能根谷) 일우(一隅)에 지사(志士)가 잠드셨으니 곧 | ||
+ | 평해인(平海人) 휘 병윤(昞允) 자 윤중(允中) 호 갈은(葛隱)이다. 시조 휘 낙(洛) 중국(中國) | ||
+ | 한조(漢朝) 학사공(學士公)이 평해(平海)에 표착(漂着)하였으며, | ||
+ | 온인(溫仁) 고려 금오장군(金吾將軍) 태자검교(太子檢校)공이고, | ||
+ | 고려 삼중대광(三重大匡) 시(諡) 충경공(忠敬公)이며, | ||
+ | 경기(京畿) 전라(全羅) 경상(慶尙) 삼도관찰사(三道觀察使)이고, | ||
+ | 임진란시(壬辰亂時) 왜적(倭敵)을 대파(大破)한 선무공신(宣武功臣) 정략장군(定略將軍) | ||
+ | 호 만휴당(晩休堂)이며, | ||
+ | 사헌부집의(司憲府執儀)이고, | ||
+ | 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이며, | ||
+ | 증조 휘 경주(景宙) 수승(壽陞) 통정(通政)공이고, | ||
+ | 비(妣)는 안동권씨(安東權氏) 정묵(正默) 여(女)이다.\\ | ||
+ | \_공은 광무(光武) 7(七)년 1903(一九〇三)년 계묘(癸卯) 5(五)월 25(二十五)일 백자봉(栢 | ||
+ | 子峯) 하흠실리(下欽室里) 제(第) 출신으로 성장시 부터 용모단정(容貌端正)하고 | ||
+ | 재기과인(才器過人)한데 일찍이 공주(公州) 이공(李公) 호익(浩翼) 문하생으로 경전자사(經傳子史)를 | ||
+ | 섭렵하고 향리 호남학원(湖南學院)에서 신문화(新文化)를 연학(硏學)하여 문사(文詞)에 | ||
+ | 조예(造詣)가 깊고 서예(書藝)에 천명(擅名)하였다.\\ | ||
- | 여기 고상능근곡(古上能根谷) 일우(一隅)에 지사(志士)가 잠드셨으니 곧 평해인(平 | + | \_선세지훈(先世之訓)을 받아 봉선치효(奉先致孝)하고 휼빈시혜지정(恤貧施惠之情)이었으나 |
- | 海人) 휘 병윤(昞允) 자 윤중(允中) 호 같은(葛隱)이다. 시조 휘락(洛) 중국(中國) 한 | + | 한말(韓末) 국력이 약해지자 침략 일본은 을사조약(乙巳條約) 경술합방(庚戌合邦) |
- | 조(漢朝) 학사공(學士公)이 평해(平海)에 표착(漂着)하였으며 二十九대조 휘 온인(溫 | + | 등이 늑약(勒約)되어 아민족(我民族)은 왜적(倭賊)에게 유린(蹂躪)당하매 |
- | 仁) 고려 금오장군(金吾將軍) 태자검교공(太子檢校公)이고 二十六대조 휘용(𤨭)고 | + | 애국지사들은 국내외로 흩어져 항일독립운동(抗日獨立運動)을 전개할 때 공 역시 |
- | 려 삼중대광(三重大匡) 시(諡) 충경공(忠敬公)이며 二十二대조 휘 천계(天繼) 경기(京 | + | 조국광복(祖國光復)의 웅지(雄志)를 품고 기회를 기다리는 |
- | 畿) 전나(全羅) 경상(慶尙) 삼도관찰사(三道觀察使)이고 十四대조 휘 귀성(貴成) 임진 | + | 김연한(金璉漢) 황세중(黃世中) 이회직(李會稙) 권병남(權丙南) 김명한(金命漢) |
- | 난시(壬辰亂時) 왜적(倭敵)을 대파(大破)한 선무공신(宣武功臣) 정략장군(定略將軍) | + | 황호중(黃浩中) 김조한(金朝漢) 김석동(金石東) 권오인(權五寅) 등 여러 인사와 더불어 |
- | 호 만휴당(晚休堂)이며 | + | 신간회(新幹會) 안동지부(安東支部)를 결성하고 민족정기(民族正氣)를 고취(鼓吹)하다가 |
- | 공(司憲府執儀公)이고 五대조 휘 복하(復河) 증 통정승정원좌승지(通政承政院左承 | + | 1930(一九三〇)년 부터는 호남학우(湖南學友)들과 청년회(靑年會)를 조직하고 후진들에게 |
- | 旨) 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이며 고조 휘 종극(鍾極) 증 가선이조참판(嘉善吏曹參 | + | 민족문화(民族文化)와 자주독립정신(自主獨立精神)을 교도(敎導)하여 일경(日警)에게 무수한 |
- | 判) 증조휘 경인(景寅) 수승통정공(壽陞通政公)이고 | + | 질곡(桎梏)을 받다가 오호(嗚呼)라 1938(一九三八)년 무인(戊寅) 7(七)월 27(二十七)일 |
+ | 조국광복(祖國光復)을 못 본체 | ||
- | 九) 비(她)는 안동권씨(安東權氏) 정묵(正默) 여(女)이다. | + | \_묘는 능근곡(能根谷) 자좌지원(子坐之原)이요 배(配) 안동김씨(安東金氏) 무진(武鎮) |
- | ( | + | 여(女)는 윤합곤순지도(允合坤順之道)를 닦더니 1994(一九九四)년 음(陰) 2(二)월 24(二十四)일 |
- | 공은 광무(光武) 七년 | + | 영면(永眠)하니 묘(墓) 동원(同原) 쌍분(雙墳)이다. 정수(庭樹)는 2(二)남 1(一)녀인데 장남 |
- | 子峯下欽室里第) 출신으로 성장시 부터 용모단정(容貌端正)하고 재기과인(才器過人) | + | 석기(錫起)는 재일교포권익보호(在日僑胞權益保護)의 공(功)으로 주일대사(駐日大使)와 |
- | 한데 일찍이 공주이공호익(公州李公浩翼) 문하생으로 경전차사(經傳子史)를 섭렵하 | + | 최규하(崔圭夏) 외무장관의 포상(褒賞)이 서수(敍受)되었고 차남 학기(鶴起)는 |
- | 고 향리 호남학원(湖南學院)에서 신문화(新文化)를 연학(研學)하여 문사(文詞)에 조 | + | 위선사업(爲先事業)과 목족사교(睦族社交)에 돈독(敦篤)하여 정린지인(井隣之人)의 칭송(稱頌)이 |
- | 예(造詣)가 깊고 서예(書藝)에 천명(擅名)하였다 | + | 높으며 여는 달성서씨(達城徐氏) 진수(珍洙)이다. 석기(錫起)의 남은 현욱(鉉旭)이고, |
- | 선세지훈(先世之訓)을 받아 봉선치효(奉先致孝)하고 훌빈시혜지정(恤貧施惠之情) | + | 현욱(鉉旭)의 남은 상경(相慶)이며 학기(鶴起)의 남은 현찬(鉉贊) 현익(鉉翼) |
- | 이었으나 한말(韓末) 극력이 약해지자 침략일본은 을사조약(乙巳條約) 경술합방(庚 | + | 현재(鉉載) 현부(鉉扶) 현우(鉉佑)이고 이하 다 기록하지 못한다.\\ |
- | 戌合邦) 등이 늑약(勒約)되어 아민족(我民族)은 왜적(倭賊)에게 유린(蹂躪)당하매 애 | + | |
- | 국지사들은 국내외로 흩어져 항일독립운동(抗日獨立運動)을 전개할때 공 역시 조국 | + | |
- | 광복(祖國光復)의 웅지(雄志)를 품고 기회를 기다리는 중 一九二七년 겨울에 김연한 | + | |
- | (金璉漢) 황세증(黃世中) 이회직(李會稙) 권병남(權丙南) 김명한(金命漢) 황호중(黃浩 | + | |
- | 中) 김조한(金朝漢) 김석동(金石東) 권오인(權五寅) 여러 인사와 더불어 신간회안동 | + | |
- | 지부(新幹會安東支部)를 결성하고 민족정기(民族正氣)를 고취(鼓吹)하다가 一九三〇 | + | |
- | 년 부터는 호남학우(湖南學友)들과 청년회(青年會)를 조직하고 후진들에게 민족문화 | + | |
- | (民族文化)와 자주독립정신(自主獨立精神)을 교도(教導)하여 일경(日警)에게 무수한 | + | |
- | 질곡(桎梏)을 받다와 오호(嗚呼)라 一九三八년 무인(戊寅) 七월 二十七일 조극광복 | + | |
- | (祖國光復)을 못본체 고종(考終)하다. | + | \_오늘도 송모계술(誦慕繼述)한 유잉(儒仍)은 공의 유풍여운(遺風餘韻) 속에 |
- | 묘는 능근곡자좌지원(能根谷子坐之原)이요 배(配) 안동김씨(安東金氏) 무진(武鎮) | + | 일익번연(日益繁衍)되고 있다. 어느날 석기(錫起) 학기(鶴起)보가 개갈지성(改碣之誠)으로 |
- | 여(女)는 윤합곤순지도(允合坤順之道)를 닦더니 一九九四년 음(陰) 二월 二十四일 영 | + | |
- | 면(永眠)하니 묘동원쌍분(墓同原雙墳)이다.정수(庭樹) 二남 -녀인데 장남 석기(錫 | + | |
- | 起)는 재일교포권익보호지공(在日僑胞權益保護之功)으로 주일대사(駐日大使)와 최 | + | |
- | 규하(崔圭夏) 외무장관의 포상(褒賞)이 서수(叙受)되었고 차남 학기(鶴起)는 위선사 | + | |
- | 업(為先事業)과 목족사교(睦族社交)에 돈독(敦篤)하여 정린지인(井勝之人)의 칭송(稱 | + | |
- | 頌)이 높으며 여는 달성서씨(達城徐氏) 진수(珍洙)이다. 석기(錫起)의 남은 현우(鉉 | + | |
- | 旭)이고, 현욱(鉉旭)의 남은 상경(相慶)이며 학기(鶴起)의 남은 현찬(鉉贊) 현익(鉉翼) | + | |
- | 현재(鉉載) 현부(鉉扶) 현우(鉉佑)이고 이하 다 기록하지 못한다. | + | |
- | 오늘도 송모계술(誦慕繼述)한 유잉(儒仍)은 공의 유풍여운(遺風餘韻) 속에 일익번 | + | |
- | 연(日益繁衍)되고 있다. 어느날 석기(錫起) 학기(鶴起)보가 개갈지성(改碣之誠)으로 | + | |
나에게 비문(碑文)을 청(請)함으로 부덕천문(不德淺文)으로 지었으나 지사(志士)의 | 나에게 비문(碑文)을 청(請)함으로 부덕천문(不德淺文)으로 지었으나 지사(志士)의 | ||
우국정신(憂國精神)과 그 업적(業績)이 금후백세(今後百歲) 날이 갈수록 빛나길 바랄 | 우국정신(憂國精神)과 그 업적(業績)이 금후백세(今後百歲) 날이 갈수록 빛나길 바랄 | ||
- | 뿐이다. | + | 뿐이다.\\ |
- | 檀紀 四三二五년 月일 | + | \_\_단기(檀紀) 4325(四三二五)년 월(月) 일(日)\\ |
- | 獨立志士紀念事業會 代表 安東 金乙東謹撰 | + | \_\_독립지사기념사업회(獨立志士紀念事業會) 대표(代表) 안동(安東) 김을동(金乙東) 근찬(謹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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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32-036.1749304942.txt.gz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6/07 23:02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