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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단증축기사(先壇增築記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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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先壇增築記事
尙論國之載籍이 莫盛於夏殷周三代而我東國에 自羅麗至鮮으로 從周之風이 漸至休明하야 於家乘國史에 傳疑傳信하야 殆難更僕하야 而究歸則實不得吾夫子褒貶之致也라 謹按萬姓氏族攷及靑邱譜實錄則黃帝氏以下로 黃氏籍一百八十四貫이 系出中國江夏라하야 一云顓頊高陽氏之后陸終이 封黃하야 因以爲氏라하고 諱洛은 官學士라 漢光武建武年間에 與漢尙書丘大林으로 始到東國越松里하니 新羅南海王時라 云하니 雖先世未發之事나 無非後日益考辨破之籍也하니 莫信莫疑를 不無杞宋無徵之歎者是也라 噫라 史蹟이 不明하고 墓所無傳하니 尤難堪風泉之慟이라 曾是設壇奉香에 且年代久遠하야 頹墻苔石하니 爲後之道에 悚懼莫極이라 今茲歲之乙卯에 宗議循同하야 重理刻珢에 配奉立碑于箕城君諱甲古太子檢校公諱溫仁軍器少尹公諱佑精門下侍中公諱裕中位하야 列序奉香하고 構齋而保衛設壇焉하니 寔月松壇也라 舊蹟이 增光하고 苾芬이 維新하니 維嶽精華가 有儼陟降이라 松栢이 森羅에 遠映三條之路하고 滄月이 映輝에 照林八角之墟하니 周道如砥에 其直如失라 立於禮하고 成於樂하니 永世進修之誠은 百世不忘키로 顚末載之云爾
  一九七六年 丙辰 小春節 裔孫 潤範 盥手 謹敍


 선단 증축 기사
 일찍이 나라의 기재된 문적이 하(夏)나라 은(殷)나라 주(周)나라 3(三)대 보다 더 성한 것은 없었을 것인데 우리 동국에서는 신라 때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주(周)나라를 따르는 풍조가 점차로 아름답고 밝은데 이르게 되어서 가문의 역사와 나라의 역사에 의심되는 것도 있고 믿을 만한 것도 있다.
 그래서 만성씨족고(萬姓氏族攷)와 청구보실록(靑邱譜實錄)을 상고해 본즉 황제(黃帝)씨 이하로 황씨의 관적(貫籍)이 184(一八四) 관(貫)행이 중국의 강하(江夏)에서 그 계통이 나왔다고 하여 한편에서는 말하기를 전욱(顓頊) 고양(高陽)씨 후 육종(陸終)이란 사람이 황(黃)에 봉(封)하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씨(氏)로 삼았다고 전하고 휘 낙(洛)은 관직이 학사(學士) 였다고 했다.
 한(漢)나라 광무(光武)제 건무(建武)년간 (25(二五) ~ 55(五五))에 한나라 상서(尙書) 벼슬을 하던 구대림(丘大林)과 더불어 처음으로 우리나라의 월송리(越松里)에 이르렀는데 이때가 신라 남해왕(南海王)때라고 말하니 이것이 비록 선조(先祖)에서 발견하지 못한 일이기는 하나 어느 문적이고 후일에 상고하고 판별해 볼 때 고치고 깨트려야 할 문적이 아닌 것이 없으니 믿을 수도 없고 의심 할 수도 없어 윗대의 확실히 증거할 만한 것이 없는 것이 한(恨)이 된다는 것이 바로 이러한 것이다.
 아! 역사적 자취가 불분명하고 묘소가 전해지지 않으니 더욱 조상을 사모하는 슬픔을 견디기 어렵도다.
 일찍이 단을 설치하고 향(香)을 받들어 올렸는데 또 년대가 오래되어 담장은 무너지고 돌에는 이끼가 돋았으니 후손된 도리에 송구스러운 마음이 더할 수가 없다.
 이제 금번 을묘년(一九七五)에 종회(宗會)의 의논이 일치하여 거듭 옥돌에 새길 것을 동의함에 비를 새워 기성군(箕城君) 휘 갑고(甲古)와 태자검교공(太子檢校公) 휘 온인(溫仁)과 군기소윤공(軍器少尹公) 휘 우정(佑精) 문하시중(門下侍中公) 휘 유중(裕中)의 위(位)에 차례대로 나열 하여 향화(香火)를 받들고 재실을 구축하고 설단(設壇)을 보위(保衛)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월송단(月松壇)이다.
 옛 자취가 더욱 빛나고 향기가 더욱 새로워 졌으니 오직 산악의 정기(조상의 혼)가 엄연히 오르고 내리는 것이 있도다. 소나무와 잣나무가 빽빽이 나열되어 멀리 세 갈래의 길을 비추고 바다 달이 팔각정(八角亭)의 수풀에 비추이고 큰 길이 숫돌처럼 평평하고 화살처럼 곧고 반듯하게 닦여져 있다.
 예(禮)에서 확립이 되고 악(樂)으로 이루어지게 되었으니 영원히 닦아 나아가는 정성이 백세동안 잊어버리지 않게 하고자 여기에 일의 시종을 기록하는 바이다.
  1976(一九七六)년 병진년 봄 후손 윤범(潤範)은 손을 씻고 삼가 짓는다.

a-100.txt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5/28 07:31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