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도구

사이트 도구


c-151

평해황씨세보총편(平海黃氏世譜總編)

 한문 원문 보기

 한문 원문 보기

 平海黃氏世譜總編
平海郡
  東至海岸七里南至慶北盈德郡界二十四里西至慶北英
  陽郡界五十一里北至蔚珍界三十八里距京六百六十里
  本高句麗斥乙
 於縣高麗初改今名顯宗時屬禮州明宗二年置監務忠烈王時以縣人黃瑞從
 王入元有翊戴功陞縣爲郡本朝因之官員郡守
 郡名斥乙於〇箕城〇平海
始祖黃洛
 按平海誌云新羅朝有稱黃將軍丘將軍者自東海舟到于平海月松造山補缺  居於崛山之北原而黃之貫平海者皆鼻祖於此人云云
 又按西崖柳文忠公記事云漢光武建武四年學士黃洛與丘將軍大林始居東  國後世有甲古乙古丙古三兄弟而甲古爲箕城君乙古爲長水君丙古爲昌原  伯云云
 又按應敎草谷公黃啓沃家古來之世牒云唐高宗龍朔八年新羅文武王八年  戊辰公與唐將李世勣同入東國公即世勣之婿也公因居穢國箕南海岸爲國  學進士云
  穢卽江陵箕
  卽箕城縣
 又近世按咸南利原姜聖宇家萬姓譜黃氏世則自學士公至金吾公詳載中  間五代姓諱及官職而東舟年號亦同草谷家世牒盖漢無學士之稱而唐朝始  有之且草谷則子孫家世牒而姜氏家年代又相符合唐朝之入居東國似爲信  蹟然但中間代序卽自學士公東渡時新羅文武王八年至文節公高麗忠烈王  朝洽爲六百有餘年則年代之差豈止於九世乎此不可遽爲憑信而姑記世次  以備後日之考據

始祖黃洛子坤离子三磨子仁君子守先子甲古子溫仁
 官學士
唐高宗龍朔
 八年始居
 東國平海
 縣
配李氏唐貞
 武公世勣
 女
學士 門下侍郞 學士 門下侍郞 箕城君 太子檢校
子乙古
長水君
子丙古
昌原伯

  自麗季以來海寇充斥衣履之藏亦失其傳故築壇月松遺墟每歲十月中丁   士庶諸孫齊會祭祀其常饗祝文曰中朝玉佩桴海而東克開克昌萬世爲宗   古無碑且無祭田 崇禎再甲戌平海豊基淸安諸宗建議立碑其後己未春   復因宗議建齋置田守護先壇〇按古來之壇齋剝落諸孫建議鳩財丁未增   築齋閣乙卯重修舊齋當秋增設位箕城君金吾公少尹公侍中公壇翌春構   壇門以配享行祀焉


 평해황씨세보 총편
평해군  (동으로는 해안이 7리요, 남으로는 경북 영덕군계가 24리오, 서로는 경북 영양군계가 51리요, 북으로는 울진계가 38리요. 서울의 거리는 660리라) 본시는 고구려의 척을어현이었으며, 고려 초부터 지금의 이름 평해니라. 고려 현종왕 때에는 예주에 속하였다가, 명종왕 2년(1172)에 다시 현감을 두어 관장이었다. 충렬왕 때에 본고을 사람 황서(黃瑞)께서 왕을 모시고 원(元)나라를 수행함으로써, 그 공이 추대되어 평해현이 평해군으로 승격되니, 이(李)조에 와서도 인하여 관원을 군수로 하다.  〇군명의 변천이 척을어 기성 평해니라.
시조 황낙(黃洛)
 옛 평해지를 상고한 즉 이르기를 신라 조에 황(黃)장군과 구(丘)장군이 있어, 동해로 부터 들어와 평해에 배를 대어 월송의 삼림을 조성하고, 굴산의 북쪽 언덕에 터를 다듬어 살았나니, 지금의 황(黃)가 성으로서 평해로 본관을 하는 이는 모두 이에 자손으로 이 어른을 시조라 이르니라.
 또 서애 유(柳)문충공 기사를 상고함에 이르되, 한(漢)나라 광무 황제 건무 4년(28) 학사 황낙(黃洛)과 더불어 구(丘)장군 대림(大林)이 동국에 처음 살아, 후대에 이르러 갑고(甲古) 을고(乙古) 병고(丙古) 3형제가 있어, 갑고(甲古)는 기성군을 하고, 을고(乙古)는 장수군을 하고, 병고(丙古)는 창원백을 하였다 이름이라.
 또 응교 초곡공 황계옥(黃啓沃)의 집에 상고로부터 내려오는 가첩을 상고하니, 이르기를 당(唐)나라 고종 황제 용삭 8년, 즉 신라 문무왕(文武王) 8년(668) 무진(戊辰)에 공과 더불어 당장 이세적과 함께 동국에 들어왔으며, 즉 이세적의 사위니라. 공이 인하여 예국의 기 남해안에 살으셨으며, 국학진사였노라. (예는 즉 강릉이오, 기는 즉 기성현이라)
 근세에 또 함경남도 이원의 강승우네 집에 소장된 만성보를 상고한 바, 황씨의 세계가 즉 학사공으로 부터 금오공에 이르기까지 중간 5대의 성휘 및 관직이 소상히 실려있으며, 동국에 들어온 연조 역시 초곡공의 집 세첩과 같으며, 모두 한(漢)나라에서는 학사(學士)라는 지칭이 없었으며, 당나라 조정에서 처음 시작됨이라. 또는 초곡공은 즉 자손의 집 세첩이오, 강씨(姜氏)네 집 만성보가 또한 부합됨이 당나라 때에 동국에 들어와 살았다는 사실이니, 이도 같이 믿을 수 있는 사적이다. 그러나 단 한가지, 중간의 대서가 즉 학사공의 동입이 신라 때 문무왕 8년(668)이면, 문절공이 고려 충렬왕조(1275)의 중신이어늘, 흡이 600여년인데 비해, 어찌하여 대수의 차가 9대 뿐일인가? 이는 아직 믿음에 의지할 바 못되나, 실려있음을 그대로써 기록이니 후일의 상고에 참고일지로다.

시조黃洛황락子坤离곤이子三磨삼마子仁君인군子守先수선子甲古갑고子溫仁온인
 관학사
당고조용삭
 8년시거
 동국평해
 현
배이씨당정
 무공세적
 여
학사 문하시랑 학사 문하시랑 기성군 태자검교
子乙古을고
장수군
子丙古병고
창원백

 고려 말이래로 해구의 도적 떼에 밀려 시조공의 분영을 잃어 전하지 못하고, 연고로 평해의 월송 유허지에 단을 모으고, 해마다 10월 중정(中丁)일에는 지위나 신분 여하를 막론하고, 모든 후손들이 모여 제사를 드리니 그 상향 축문에 가로되,
 中朝玉佩(중조옥패) 중조의 찬연한 옥패가
 桴海而東(부해이동) 물 건너 해맞이 턱에서
 克開克昌(극개극창) 활짝 피워 크게 퍼짐에,
 萬世爲宗(만세위종) 만만세세 빛을 이으리
하오나, 상고로부터 제단에 위패비도 없었거니와 위토도 없었음에, 숭정 재 갑술(甲戌)(1694)년 10월에, 평해 풍기 청안의 모든 일가의 의논을 일으켜 비를 세우고 그후 기미(己未)년 봄에 다시 종중 의논으로, 재실을 세우고 위토를 장만하여 선단을 수호함에 오늘에 이름이라.
 〇고래로 내려오는 단이나 재실이 헐고 기울어, 모든 후손들이 의견을 세워 재산을 모아, 정미(丁未)(1967)년에 재각을 증축하고, 을묘(乙卯)(1975)년에 구 재실을 수리하고, 당년 가을에 기성군 금오공 소윤공 시중공 연 4대위의 제단을 더 설치하였고 그 이듬해 봄에는 선단의 문을 새로이 세워 배향으로서 예로써 행사를 올림이라。

c-151.txt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6/27 11:32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