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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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溫仁金吾將軍 於公爲十三代祖也 四傳 諱璡檢校軍器監 三傳 諱瑾藝文館直提學 | 諱溫仁金吾將軍 於公爲十三代祖也 四傳 諱璡檢校軍器監 三傳 諱瑾藝文館直提學 | ||
寔生諱有定工曹判書 寔生諱鋋順興訓導 自榮州 始居豊基 即先生之五代祖也 高祖 | 寔生諱有定工曹判書 寔生諱鋋順興訓導 自榮州 始居豊基 即先生之五代祖也 高祖 | ||
- | 諱末孫 司醞署主簿 曾祖 諱孝仝順陵參奉 祖諱 鱓義陵參奉 考 諱俊良號錦溪 | + | 諱末孫 司醞署主簿 曾祖 諱孝仝順陵叅奉 祖諱 鱓義陵叅奉 考 諱俊良號錦溪 |
受業于退溪先生之門 以學行著官止星州牧使而早卒 退溪先生 甚爲哀惜之手書棺上曰 | 受業于退溪先生之門 以學行著官止星州牧使而早卒 退溪先生 甚爲哀惜之手書棺上曰 | ||
- | 嗚呼亡友錦溪黃先生 繼而書碣面 刊遺稿撰行狀後贈以嘉善 階吏曹參判 妣 贈貞夫人 | + | 嗚呼亡友錦溪黃先生 繼而書碣面 刊遺稿撰行狀後贈以嘉善 階吏曹叅判 妣 贈貞夫人 |
永川李氏 察訪文樑之女 聾巖先生賢輔之孫女也 先生 以明宗十九年(一五六四)甲子 | 永川李氏 察訪文樑之女 聾巖先生賢輔之孫女也 先生 以明宗十九年(一五六四)甲子 | ||
生於豊基邑郁錦里 而先考公棄世之時 膝下无育 故 遽取季公秀良之長子諱之瑍 | 生於豊基邑郁錦里 而先考公棄世之時 膝下无育 故 遽取季公秀良之長子諱之瑍 | ||
爲後嗣矣 厥後九月 以遺腹子 先生 生焉 初名天守 外祖考察訪公所作取賴天有守之意也云 | 爲後嗣矣 厥後九月 以遺腹子 先生 生焉 初名天守 外祖考察訪公所作取賴天有守之意也云 | ||
己巳(一五六九) 以六歲之童 往訪于陶山汾川里之外宅 外祖考 携往而之矜九堂 | 己巳(一五六九) 以六歲之童 往訪于陶山汾川里之外宅 外祖考 携往而之矜九堂 | ||
- | 謁見于退溪先生 先生 一見而奇愛之 遂執贄而受讀經史 兼治功令業 然值時不辰 | + | 謁見于退溪先生 先生 一見而奇愛之 遂執贄而受讀經史 兼治功令業 然値時不辰 |
因壬亂之起 棄而不治 以門蔭階通德 後移居于醴泉邑鳳洞 爲鳳洞系入鄕之祖焉 | 因壬亂之起 棄而不治 以門蔭階通德 後移居于醴泉邑鳳洞 爲鳳洞系入鄕之祖焉 | ||
旣而同宗海月公汝一 先生曁中立兩公 先後相繼而來臨玆郡 以故 先生盡心協贊 | 旣而同宗海月公汝一 先生曁中立兩公 先後相繼而來臨玆郡 以故 先生盡心協贊 | ||
- | 有功於其治政焉 先生常以讀書窮理 爲爲學之本 以不欺慎獨 作制行之則 | + | 有功於其治政焉 先生常以讀書窮理 爲爲學之本 以不欺愼獨 作制行之則 |
務遵庭訓 於是乎爲一鄕之師表焉 仁祖五年(一六二七)丁卯 十二月 二十七日 卒 | 務遵庭訓 於是乎爲一鄕之師表焉 仁祖五年(一六二七)丁卯 十二月 二十七日 卒 | ||
享年 六十四 葬于醴泉邑淸福二里山六○之一番地旀屹味巽坐之原配恭人安東權氏 | 享年 六十四 葬于醴泉邑淸福二里山六○之一番地旀屹味巽坐之原配恭人安東權氏 | ||
줄 25: | 줄 25: | ||
墓舊無顯刻故諸孫 以是爲懼者久矣 | 墓舊無顯刻故諸孫 以是爲懼者久矣 | ||
頃者一宗合謀鳩財以飾墓諸宗命不肖以記陰之文 義不敢辭 謹按譜牒 | 頃者一宗合謀鳩財以飾墓諸宗命不肖以記陰之文 義不敢辭 謹按譜牒 | ||
- | 參以所傳文字略述如右云耳\\ | + | 叅以所傳文字略述如右云耳\\ |
\_\_一八七九年 五月 日\\ | \_\_一八七九年 五月 日\\ | ||
\_\_後孫厚杓謹撰\\ | \_\_後孫厚杓謹撰\\ | ||
줄 39: | 줄 39: | ||
휘(諱) 유정(有定)을 낳으시니 공조판서(工曹判書)요 이분이 휘(諱) 연(鋋)을 낳으시니 순흥(順興) 훈도(訓導)요 영주(榮州)에서 처음으로 | 휘(諱) 유정(有定)을 낳으시니 공조판서(工曹判書)요 이분이 휘(諱) 연(鋋)을 낳으시니 순흥(順興) 훈도(訓導)요 영주(榮州)에서 처음으로 | ||
풍기(豊基)에 거주(居住)하시니 곧 선생(先生)의 5대조(五代祖)이시다. 고조(高祖)는 휘(諱) 말손(末孫)이시니 사온서(司醞署) 주부(主簿)요 증조(曾祖)는 | 풍기(豊基)에 거주(居住)하시니 곧 선생(先生)의 5대조(五代祖)이시다. 고조(高祖)는 휘(諱) 말손(末孫)이시니 사온서(司醞署) 주부(主簿)요 증조(曾祖)는 | ||
- | 휘(諱) 효동(孝仝)이시니 순릉(順陵) 참봉(參奉)이요 조(祖)는 휘(諱) 치(觶)이시니 의릉(義陵) 참봉(參奉)이요 고(考)는 휘(諱) 준량(俊良)이요 호(號)는 금계(錦溪)이시니 | + | 휘(諱) 효동(孝仝)이시니 순릉(順陵) 참봉(叅奉)이요 조(祖)는 휘(諱) 치(觶)이시니 의릉(義陵) 참봉(叅奉)이요 고(考)는 휘(諱) 준량(俊良)이요 호(號)는 금계(錦溪)이시니 |
퇴계(退溪) 선생(先生)의 문하(門下)에서 수업(受業)하시어 학행(學行)으로 나타나시었고 관직(官職)은 성주목사(星州牧使)에 그치셨으며 | 퇴계(退溪) 선생(先生)의 문하(門下)에서 수업(受業)하시어 학행(學行)으로 나타나시었고 관직(官職)은 성주목사(星州牧使)에 그치셨으며 | ||
조졸(早卒)하시니 퇴계 선생(先生)께서 심(甚)히 애석(哀惜)히 여기시어 손수 관(棺) 상(上)에 쓰시기를 ' | 조졸(早卒)하시니 퇴계 선생(先生)께서 심(甚)히 애석(哀惜)히 여기시어 손수 관(棺) 상(上)에 쓰시기를 ' | ||
- | 이라 하시고 이어서 묘갈(墓碣)의 전면(前面)을 쓰시고 유고(遺稿)를 간행(刊行)하시고 행장(行狀)을 찬(撰)하시었으며 후일(後日)에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追贈)되시었다. 어머니는 증(贈) 정부인(貞夫人) 영천이씨(永川李氏)이시니 찰방(祭訪) 문량(文樑)의 여(女)요 | + | 이라 하시고 이어서 묘갈(墓碣)의 전면(前面)을 쓰시고 유고(遺稿)를 간행(刊行)하시고 행장(行狀)을 찬(撰)하시었으며 후일(後日)에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叅判)에 추증(追贈)되시었다. 어머니는 증(贈) 정부인(貞夫人) 영천이씨(永川李氏)이시니 찰방(祭訪) 문량(文樑)의 여(女)요 |
농암(聾巖) 선생(先生) 휘(諱) 현보(賢輔)의 손녀(孫女)이시다. 선생(先生)은 명종(明宗) 19년(十九年)(1564(一五六四)) 갑자(甲子)로 풍기읍(豊基邑) 욱금리(郁錦里)에서 | 농암(聾巖) 선생(先生) 휘(諱) 현보(賢輔)의 손녀(孫女)이시다. 선생(先生)은 명종(明宗) 19년(十九年)(1564(一五六四)) 갑자(甲子)로 풍기읍(豊基邑) 욱금리(郁錦里)에서 | ||
살으시었다. 그런데 선고(先考) 공(公)께서 기세(棄世)하실 때에는 슬하(膝下)에 무육(无育)이셨으므로 서둘러 계씨(季氏) 수량(秀良)의 | 살으시었다. 그런데 선고(先考) 공(公)께서 기세(棄世)하실 때에는 슬하(膝下)에 무육(无育)이셨으므로 서둘러 계씨(季氏) 수량(秀良)의 | ||
줄 55: | 줄 55: | ||
잇달아 이 고을의 수령(守令)으로 내림(來臨)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선생(先生)께서 진심협찬(盡心協贊)하여 그의 치정(治政)에 | 잇달아 이 고을의 수령(守令)으로 내림(來臨)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선생(先生)께서 진심협찬(盡心協贊)하여 그의 치정(治政)에 | ||
공(功)이 있으시었다.\\ | 공(功)이 있으시었다.\\ | ||
- | \_선생(先生)께서는 항상(恒常) 독서(讀書)와 궁리(窮理)로 학문(學問)하는 근본(根本)으로 삼으시고 불기(不欺)와 신독(慎獨)으로 행실(行實)을 | + | \_선생(先生)께서는 항상(恒常) 독서(讀書)와 궁리(窮理)로 학문(學問)하는 근본(根本)으로 삼으시고 불기(不欺)와 신독(愼獨)으로 행실(行實)을 |
제어(制御)하는 준칙(準則)으로 삼으시어 정훈(庭訓)을 따르기에 힘쓰셨으니 이에 일행(一鄕)의 사표(師表)가 되시었다.\\ | 제어(制御)하는 준칙(準則)으로 삼으시어 정훈(庭訓)을 따르기에 힘쓰셨으니 이에 일행(一鄕)의 사표(師表)가 되시었다.\\ | ||
\_인조(仁祖) 5년(五年) 1627(一六二七) 정묘(丁卯) 12월(十二月) 27일(二十七日)에 별세(別世)하시니 향년(享年) 64(六十四)이셨고 예천읍(醴泉邑) 청복2리(淸福二里) 산60(山六〇)의 1(一)번지(番地) 며흘미(旀屹味) 손좌원(巽坐原)에 장례(葬禮)를 모시었다. 배(配)는 공인(恭人) 안동권씨(安東權氏)이시니 휘(諱) 두문(斗文)의 여(女)이시다. | \_인조(仁祖) 5년(五年) 1627(一六二七) 정묘(丁卯) 12월(十二月) 27일(二十七日)에 별세(別世)하시니 향년(享年) 64(六十四)이셨고 예천읍(醴泉邑) 청복2리(淸福二里) 산60(山六〇)의 1(一)번지(番地) 며흘미(旀屹味) 손좌원(巽坐原)에 장례(葬禮)를 모시었다. 배(配)는 공인(恭人) 안동권씨(安東權氏)이시니 휘(諱) 두문(斗文)의 여(女)이시다. | ||
줄 66: | 줄 66: | ||
옛날에는 현각(顯刻)이 없었다. 그러므로 여러 자손(子孫)들이 이를 걱정한 지 오래되었는데, | 옛날에는 현각(顯刻)이 없었다. 그러므로 여러 자손(子孫)들이 이를 걱정한 지 오래되었는데, | ||
종친(宗親)들이 계모(計謨)를 합(合)하고 재물(財物)을 모아 묘소(墓所)를 수식(修飾)하여 드리기로 하였다. 제종(諸宗)들이 불초(不肖)에게 | 종친(宗親)들이 계모(計謨)를 합(合)하고 재물(財物)을 모아 묘소(墓所)를 수식(修飾)하여 드리기로 하였다. 제종(諸宗)들이 불초(不肖)에게 | ||
- | 비음(碑陰)에 기록(記錄)할 글월을 지어라 하시기로 의리상(義理上) 감(敢)히 사양할 수 없으므로 삼가 보첩(譜牒)을 상고(詳考)하고 전(傳)해오는 문자(文字)를 참작(參酌)하여 간략(簡略)하게 서술(叙述)하기를 우(右)와 같이 하는 바이다.\\ | + | 비음(碑陰)에 기록(記錄)할 글월을 지어라 하시기로 의리상(義理上) 감(敢)히 사양할 수 없으므로 삼가 보첩(譜牒)을 상고(詳考)하고 전(傳)해오는 문자(文字)를 참작(叅酌)하여 간략(簡略)하게 서술(敍述)하기를 우(右)와 같이 하는 바이다.\\ |
\_\_1879(一八七九)년 5(五)월 일\\ | \_\_1879(一八七九)년 5(五)월 일\\ | ||
\_\_후손 후표(厚杓) 짖고\\ | \_\_후손 후표(厚杓) 짖고\\ |
a-111.1747972842.txt.gz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5/23 13:00 저자 ssio2